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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세계사

한국 근현대사 서술을 놓고 어느 한 쪽으로 많이 치우쳤다는 논쟁이 치열하게 오가고 있다.미국에서 가르치는 미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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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서술을 놓고 어느 한 쪽으로 많이 치우쳤다는 논쟁이 치열하게 오가고 있다.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놓고도 그 해석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거기에는 주류적 시각이 있고, 비주류적 시각도 있다. 어지럽다.

하지만 그것은 현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의 간극이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 사이에 꽤나 벌어져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측면이기도 하다. 현실 인식은 역사에 대한 관점과 밀접하게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 현실 인식의 한 가운데 미국이 있다.


미국은 우리 현대사에서 때려야 땔 수 없는 나라이다. 한 때는 이쪽의 시각이, 또 한 때는 저쪽의 시각이 대세를 장악했지만 어딘가 미진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특정 진영의 필요에 의해 형성된 우리 내부의 관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우리의 관점은 객관적일까? 그런 측면에서, 미국민은 자기 나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나라의 역사를 그들은 현재 어떻게 기술하고 있느냐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특히 중고등학교 역사책에 자신들을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중고등학교 자국 역사책에 기술된 내용은 한 줄 한 줄이 모두 논문 수 십 편을 집대성한 결과이다. 그래서 그 나라 주류적 시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미국학교에서 가르치는 미국역사는 그런 측면에서 반갑다.

우리의 조성일 친구가 2012년 12월31일자로 출간한 302쪽 분량의 책이다.

친구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아이들이 유학을 가게 되어 실제 준비하는 과정에서 유학 가는 나라의 역사에 대해 미리 한번 훑어보고 가는 것도 좋겠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렇지, 암 그렇지. 현재의 그 나라를 파악하려면 그 나라 사람이 쓴 그 나라 역사를 들여다봐야지.


책머리에서 조성일 친구는 미국이란 나라가 “좋은 이미지보다 나쁜 이미지가 더 강했었고, 그건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고, 이 책을 씀으로써 “미국에 대한 역사인식을 보다 객관화시킬 수 있었다”고 심경을 피력했다. 흐흐흐. 절묘한 설명이다. 대충 짐작되고도 남는다. 父情은 그 어떠한 의식 범주를 초월하니까.


우리는 사회를 구조적인 측면으로 바라보는데 익숙해져 있다. 사회 구성체(사구체) 이론의 결과이다. 사회 구성체 논쟁은 70년대-80년대 대학가를 뜨겁게 달구었던 논쟁이다. (구성체 내의)계급이니, (구성체 바깥과의) 종속이니 하며 논쟁하다가 결국 우리의 근현대사를 다시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를 거쳐 마침내 태백산맥이란 걸출한 대하소설의 등장으로 귀결되었다.

사회구성체 이론은 당시 사회상에 도전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현실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한 문제점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점 중의 하나가 과연 자식에게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오늘의 문제는 과거의 구조적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자식은 미래를 살아갈 존재들이다. 미래는 불확실성의 세계에 놓여 있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바로 구조적인 결정론으로 대답할 수 없는, 자유 의지의 문제이다.

미래의 자식들은 결코 현재의 구조가 결정한 틀에 종속되어 피동체로 살아간다고 규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식들에게 바로 그 자유 의지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자유 의지는 필연적으로 영웅을 조제하게 된다.

한 시대의 수많은 난제를 해결하고 다음 세대로 역사의 새로운 맥을 넘겨준 그 영웅들.


그래서 父情은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는 닐리리빤빠 했어도 자식들에게는 자기처럼 살지 말라고 가르치려 든다. 비록 자신이 가난한 노동자 농민의 편에 선다 하더라도, 그래서 노동자 농민의 위대성을 강조하더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바로 그 ‘위대한’ 노동자 농민의 일원이 되라고 가르쳐 들려 않는다. 아버지니까. 자신은 비록 역사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더라도, 청소년기 자식들에게는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을 본받으라고 애써 강조한다.

父情이 잉태한 그 이율배반성은 결국 역사인식으로 귀결된다.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창조적 소수자의 역할, 영웅의 미담을 애써 가르치려 들기 때문에, 결국 그 방향으로 기술된 책을 권면하게 된다. 자신의 역사인식과 다른 역사책을 권면하게 되는 것이 부모일 것이다.


어쨌거나 조성일 친구의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미국의 역사를 일구어 간 리더들의 “위대한 선택”의 순간들을 접할 수 있었고, 그동안 잊고 지냈던 영웅담을 되뇌일 수 있어 좋았다. 물론 전체적 흐름은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모습과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조성일 친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간 곳곳에 자신의 견해를 살짝살짝 박아 넣었다. 父情 속에 살짝 드러난 자신의 역사인식이다. 미국 역사의 걸출한 영웅(리더) 이면에 도사린 시대적 콘텍스트가 바로 그것이다.


리더들의 이야기는 많이들 알고 있으니, 바로 조성일 친구가 살짝살짝 박아 넣었던 그 시대적 콘텍스트를 애써 확대해 보자. 그것이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른들 만의 소득일 것이다. 나에게 인상 깊었던 내용을 3가지만 요약해 본다.


첫 번째는

남북 전쟁은 관세부과로부터 촉발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권한 문제로 비화되었고, 남부 노예州와 북부 자유州의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증폭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대서양 옷 무역은 노예 노동에 기반을 둔 남부의 목화가 영국으로 건너가 직물화 되고, 그 직물 혹은 완제품(옷)이 다시 미국으로 수입되는 3각 무역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연방정부가 자국의 면방직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율을 올리자, 영국으로부터의 직물 수입이 감소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남부의 목화 수출이 덩달아 급감 하였다는 것. 그런데 내수를 담당하던 북부 공업주들이 혜택을 보니, 남부와 북부의 갈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러운 양키 놈(북부)들이 국부 증대란 이름으로 남부를 재물로 삼다니.

남부 노예州들은 관세부과 건이 연방정부가 아니라 주정부의 권한이라고 주창을 하면서 연방정부에 도전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항이다.

링컨의 노예해방령은 남북 전쟁에 대한 명분을 부과하기 위해 취해졌던 정치적 행위였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북부 사람들은 이 참에 노예나 부리던 남부를 깔아뭉개자고 했지만, 링컨은 大화합정책을 취한다. 그러나 링컨은 남부를 절멸시킨 원흉이란 이름으로 남부 출신 배우에게 저격을 받아 사망한다.

노예해방은 이후 북부 공업지대가 풍부한 흑인 노동력을 유입받는 계기가 되었고, 남부 농장 지대가 농업 기계화되는데 촉매제로 작용했다. 이 둘은 선순환 기제를 이루는데, 역사 전개의 역설이다.


두 번째는

미국의 정세 변화가 구대륙의 정치적 변동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7년 전쟁(1756-1763)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슐레지엔 영토 분쟁에 유럽 각국이 두 패로 나뉘어 싸움박질 한 전쟁이었다. 영국은 프로이센 편에,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편에 합류하였다.

이 전쟁 기간 동안 북미 동부의 식민지인들은 식민 종주국 영국 편에 서서 오대호 주변의 프랑스를 구축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래서 영국은 7년 전쟁의 와중에서도 이 지역을 자국의 식민지로 편입한다. 퀘백은 프랑스人들이 이주 개척한 식민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생뚱맞게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독립전쟁(1775-1783)은 그 반대의 정치역학이 작동된 결과였다. 전비 충당을 위해 고군부투하던 영국 정부가 식민지에게 과세하자(설탕법-인지세-타운센트법-茶조례) 북미 식민지인들은 집단으로 반발하며 프랑스와 내통했다. 프랑스의 무력지원과 경제적 도움으로 식민지인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반영 차원에서 이루어진 미국 독립 지원은 역설적으로 프랑스 전제 왕정의 악몽의 시작이 된다. 전비 조달에 시달렸던 프랑스 루이 16세가 삼부회를 소집하여 제3계급에게 증세하려 한 것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항이다.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1800-1814)은 독립 미국에게 뜻하지 않은 선물을 주게 된다. 나폴레옹이 전비를 마련한답시고, 미시시피강 서안의 광대한 중부 대평원 땅을 헐값에 미국에 팔아넘긴 것이다. 중부 대평원(당시 이름은 루이 국왕의 이름을 따 루이지애나)은 일찍이 프랑스 탐험가가 오대호에서 미시시피 강을 따라 탐험함으로써 프랑스 땅이 된 지역이었다. 나폴레옹은 상당수 프랑스 진보주의자들에게 프랑스 혁명정신을 유럽 각국에 전파시킨 영웅으로 떠받들어지지만, 그 뒷면에는 프랑스보다 더 큰 땅을 미국에 팔아넘긴 전력이 숨겨져 있다.

미국이 비주체적 나라라고 말할 사람은 이 지구상에 한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주체적 나라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다. 핵심은 그들 식민지인들 그리고 이후 미국인들이, 유럽에서 벌어지는 정세 변화를 능동적으로 잘 활용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미국 역사는 생활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악착같을 정도로 집착한 결과라는 것이다. 집착의 대상은 자신들만의 종교였고, 자신들만의 경제였다. 그리고 매 단계 마다 영웅들이 등장하여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들 미국인들은 자유를 향한 여정이라고 하는 것 같다.

북미 일대를 식민지로 분점 했던 스페인, 프랑스 영국 중 영국이 승리했다는 것(영불전쟁), 또 영국의 식민 이민자들이 영국 본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는 것(독립전쟁), 그들이 카리브해와 태평양까지 영토를 팽창하는 과정에서 인디언과의 전쟁, 미-멕시코 전쟁, 미-스페인 전쟁 등 온갖 싸움질을 수행했다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미국.

그런데, 왜 프랑스人도 아니고, 스페인人도 아닌 영국계 WASP가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되었을까?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아마도 그들 이주민 공동체가 막장에서 울부짖었던 자유. 그 자유를 위해 쏟은 자유민들의 에너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구대륙의 닫힌 공간으로부터 탈출했던 이주민들의 에너지.

프랑스 스페인과는 다르게, 영국의 퓨리턴들은 구대륙에서 더 이상 피난할 곳이 없어 처녀지로 건너온 사람들이다. 스페인 프랑스의 억압받던 사람들은 네덜란드로 건너갔었다. 네덜란드도 사람들이 차고 넘치자 사람들은 영국 스코틀랜드로 이주했다. 거기서 퓨리턴들은 영국 성공회의 종교적 박해를 받는다. 구대륙 어디에도 그들이 피난할 곳은 없었기에 그들은 낯선 신대륙을 선택한다. 미국 대륙은 이주를 위한 충분한 땅덩어리를 갖고 있었다. 한 지역에서 박해 받으면 그들은 서부로 서부로 이주했었다.

이주민들이 막스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노동 윤리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으로 무장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무엇보다 WASP들이 승리하게 된 이유는 그들 조상들이 막장에서 울부짖었던 자유를 향한 에너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을 생의 의지라고 불러도 좋을 듯싶다.


구한말에서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 남도 농민들이 만주로 연해주로 이주한 역사를 생각한다면, 억압의 막장에서 울부짖었던, 자유를 향한 에너지는 그 파괴력이 놀라울 수밖에 없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내 팽개쳐진 한민족의 생존력 또한 생의 의지를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해외로 이주한 한국인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탈출한 탈북민들, 그들이 외치는 한 마디. “내비둬 씨발. 난 나대로 살거야”. 그것은 자유를 향한 다른 표현일 것이다.


Let it be(내비둬). 바로 미국 학교에서 가르치는 미국역사가 암시하는 소위 “영웅사관”의 긍정적 측면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수 많은 시대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 난관을 헤쳐 가는 리더들의 이야기, 자유를 향한 에너지 그리고 생의 의지.

바로 그렇기에 우리 조성일 친구가 북미 대륙에 유학 간 자녀에게 읽히고 싶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자신의 역사 인식에 다소 반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썼을 것이다. 그 놈의 父情 때문에 쓴 책. 미국학교에서 가르치는 미국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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