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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세계사

1929년 이후의 세계 경제공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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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의 파산
문명사회에 지옥 불을 퍼부은 첫 번째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끝난 뒤 자본주의 선진국에서는 '번영으로 가는 새로운 시대'를 예찬하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쟁에서 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전쟁배상금에 짓눌려 허덕였고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 종속국 민중이
제국주의 지배와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미국과 유럽 강대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영국을 중심으로 금본위제도를 다시
세워 국제무역도 제자리를 잡았다. 강대국들 사이에는 군사력을 키우려는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지만 겉으로는 국제연맹이 세계평화를 위해 힘쓰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전쟁이 먼 옛날 일인 것처럼 생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경제 중심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아갔다.
미국은 30억 달러나 빚을 지고 있다가 몇 해 사이에 다른 나라에 150억 달러나 돈을 빌려준 첫손꼽는 채권국으로 올라섰다. 미국 자본가들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유럽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렇게 호경기가 계속되자 세계경제의 심장이 된 뉴욕 월스트리트 증권 거래소는
하루같이 오르기만 하는 주식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일찍이 아담 스미드는 "국부론"에서 모든 개인이 오직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사회 전체의 번영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았다. 1929년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번영의 꼭대기에 올라섰다. 자본주의 사회제도에 대한 절망과 비관은 모두 사라졌고 미래는
아름다운 장미 빛으로 물들었다. 특히 미국에서 스미드의 낙관적 이론은 경제이론을 넘어 하나의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그 누구도 바로 코밑에
지옥으로 가는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1929년 10월 24일도 증권거래소가 문을 열기 전까지는 좋은 날이었다.
그런데 이날 하루 동안 모든 일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주식 값이 갑자기 곤두박질을 시작한 탓이다. 무슨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사람들이 너나없이 주식 값이 덜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면서 주식을 팔아 버리려고 한꺼번에 몰려나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당장 파산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오후 들어 월스트리트에 있는 어떤 높은 건물 꼭대기에 웬 남자가 나타났다. 그러자 이 남자가 뛰어내리는 것을 보려고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남자는 사실 다른 일 때문에 옥상에 올라갔는데 구경꾼들이 오해를 한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오해를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이날 하루 동안 주식 값이 떨어져 알거지가 된 주식투자가 가운데 무려 11명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이때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주가폭락은 세계대공황으로 번져 나가 인류에게 그 이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재앙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날은 '검은 목요일'이라고 기록했다.
주식 값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닷새 지난 화요일에 또다시 곤두박질을 쳐 하루에 무려 절반이나 떨어졌다. 절망의 골짜기는 끝없이 깊었다. 해가 바뀌고
다음해 여름에 접어들 무렵 주식 값은 1929년 9월에 비해 8분의 1 수준까지 내려갔다. 주식 값 폭락은 무시무시한 폭풍우로 변해 세계경제를 강타했다.
미국에서만 5천 개 은행이 부도를 냈고 그 바람에 저금통장 9백만 개가 쓸모 없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파산한 기업은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 폭풍우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단숨에 뛰어넘어 런던, 파리, 베를린, 동경 등 모든 증권거래소에 밀어닥쳤다. 월스트리트를 덮친 '검은
목요일'은 자본주의 경제제도가 존재하고 있던 모든 나라, 모든 도시, 모든 공장, 그리고 그곳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가정에 빠짐없이 찾아와 그 어둡고
불길한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
자유방임시장이 몰고 온 비극
대공황이 일어난 원인을 두고 경제학자들은 여러 가지 학설을 내놓았지만 어느 것도 완전하지는 않다. 그러나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공황이 자본주의가 타고난 고질병이라는 데는 대체로 의견을 같이한다. 공황은 19세기 초반 이후 10여 년마다 반복해서 찾아들었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1920년대 번영이 언젠가는 공황을 불러들일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조차도 그처럼 폭넓고 파괴적인 공황이 여러 해 계속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1920년대 유럽과 미국 자본주의 선진국에서는 공업생산이 빠르게 늘어났다.
식민지 종속국에서도 농산물과 원료 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자본가들은 눈부시게 발전한 기술 덕분에 노동력을 절약하는 새로운 기계를 들여왔다.
그래서 상품생산은 빠르게 늘어났다. 하지만 소비자의 구매력은 그것을 다 사서 소비할 만큼 빨리 성장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팔리지 않은 농산물과
원료가 창고에 쌓였고 결국 1920년대 중반 국제시장에서는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자 자본가들은 임금을 더 적게 주고 생산비를 줄일 수 있어서 잠시
기뻐했다. 그러나 소비자인 노동자 농민의 소득이 줄어든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어서 공업분야에서도 불길한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25년부터
미국에서는 건축산업이 내리막기로 접어들었고 1929년 6월부터는 공업생산이 제자리걸음을 시작했다.
그런데도 주식 값은 1929년 내내 오르기만 했다. 사람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경기가 좋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너도나도 주식을 사려고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서부에서 금광을 찾으러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지만 이제는 한 건 하려는 사람들이 모두 증권거래소로 몰려들었다. 평범한 점원이나
간호원이 주식을 사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아다니는 가운데 처음에는 제법 부유한 의사나 변호사들이 주식을 샀다. 그러니 주식 값은
비누거품처럼 부풀어 하늘 끝까지라도 올라갈 듯 기세 좋게 치솟았다.
그런데 곧 호경기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가면서 사태는 하루아침에 거꾸로 돌아섰다. 불황이 시작되면 주식 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 사람들은 남보다 한 발 먼저 주식을 팔아치우려고 나섰다. 살 사람은 없는데 모두가 팔려고만 하니 불경기가 오기도 전에 주식 값이 먼저
내려앉았다. 그리고 주식 값이 떨어질 기색을 보이자 더 많은 사람들이 주식을 팔려고 몰려나왔다. 그러면 그럴수록 주식 값은 더 큰 폭으로 떨어졌다.
어제까지는 돈을 꿔서라도 주식을 사려고 설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것을 팔지 못해 야단법석이었다.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은 이런 일이 막 시작된 날이다.
사람들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이 비누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10월 1인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주식 값은 870억 달러
어치였다. 그런데 11월 1일에는 그 액수가 550억 달러로 줄어들었고 1933년 3월에는 겨우 190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무려 7백억 달러에 가까운 돈이
증권거래소 게시판에서 녹아 없어진 것이다. 꼭 마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주식을 잡히고 은행돈을 꾼 사람들은 그 주식을 다 팔아도 빚을 갚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파산하여 땅과 집을 빼앗겼다. 빌려 준 돈을 제대로
돌려 받지 못하자 몇몇 은행이 부도를 냈다. 은행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시민들은 예금통장을 들고 은행에 몰려와 예금 한 돈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쳤다. 은행은 그들이 맡긴 돈 가운데 일부만 현금으로 남기고 다 누군가에게 빌려준 탓에 한꺼번에 몰려든 예금주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은행들이
추풍낙엽 마냥 쓰러졌다. 요즘 같으면 정부나 중앙은행이 나서서 은행부도를 막아 주겠지만 당시 미국에는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고 그렇게 할 만한 중앙은행제도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시민들은 휴지조각으로 변해 버린 예금통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다가 어쩔 수 없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출을 줄였다. 물건이 잘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자
기업가들은 생산을 줄이고 노동자를 해고했다. 실업자가 늘어날수록 소비자의 구매능력은 더 줄어들었고, 그래서 기업가들은 더 많은 노동자를 해고했다.
그리고 자금이 부족한 기업이 줄줄이 파산하자 실업자는 더 늘어났다.
처음에는 불경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주식 값이 폭락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주식 값 폭락이 더 지독한 공황을 불러왔다. 국가가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개인의 판단과 결정에 맡겨 두는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이렇게 해서 끔찍한 종말을 맞았다. 자본주의는 결코 내버려두어도 번성하는 들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썩어 가는 오렌지, 굶주리는 아이들 대공황은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 없는 이상한 사건이다. 시민들 나름대로 무얼 사 두면 재산을 늘릴 수 있을까를 따져 본 끝에 주식 값이 오를때 샀고 내릴 때는 팔았다. 자본가들은 경기가 좋으면 투자를 늘렸고 물건이
안 팔리면 생산을 줄였다. 소비자들은 소득이 줄고 일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씀씀이를 줄였을 뿐이다. 모두가 현명한 행동을 했는데 사회 전체가
불행해졌으니 서로 원망할 수 도 없는 일이었다.
창고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득 쌓아 놓고도 밖에서 얼어죽고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면 바보가 아니면 정신병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공황이
위세를 떨치는 동안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그런 짓을 했다. 그것도 스스로 세계를 이끄는 문명사회를 만들었노라고 자랑하던 사람들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해에 걸쳐서. 상점과 공장 창고에는 팔리지 않은 물건이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그런데
거리에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며 돌아다녔다. 상품은 너무 많은데 그것을 쓸 사람들에게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쉴
사이 없이 돌아가던 기계는 거기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노동자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열심히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기업가는 물건이
팔리지 않기 때문에 공장을 돌릴 수 없었고 그래서 그들을 고용할 수 없었다.
상점 진열대도 그대로였고 은행에서 발행한 현금도 누군가의 금고에 들어 있었지만 아무도 그 돈을 투자하려 들지 않았다. 야적장에는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경내 떨며 살았고 거지꼴을 한 아이들이 철조망 사이로 석탄을 훔치려 다녔다. 캘리포니아 농장에서 오렌지
공급을 줄이려고 농장주들이 멀쩡한 오렌지에 석유를 뿌려 썩이는 동안 뉴욕 빈민가 어린이들은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새로운 기계와 신품종 오렌지를
개발한 과학자들은 창고를 상품으로 가득 채우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그것을 지혜롭게 나누어 쓰는 문제에 대해서는 과학자도 정치가도 기업가도
뾰족한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공항 때문에 손해를 보지는 않았다. 부자들은 더 큰 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쓰러진 경쟁기업을 헐값에 사들이고 값이 떨어진
주식을 긁어모았다. 대공황이라는 폭풍우를 견뎌 낸 기업은 시장을 지배하는 독점기업으로 성장했다. 한편에서 가난과 절망이 켜켜이 쌓여 가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더 많은 재산을 쌓아 올린 것이다.
자유방임시장은 결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 그 가운데 오직 돈이 뒷받침하는 것만을 줄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겨운
호소에는 냉혹하지만 돈 가진 사람들의 사치스런 요구에는 더없이 고분고분하다. 그래서 부잣집 마나님은 못생긴 개한테 먹일 스테이크를 손쉽게
구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귀중한 아이들에게 썩은 감자나마 배불리 먹이기가 힘들었다.
대도시 빈민구호소 앞에 긴 줄을 이룬 실업자들은 몸과 마음이 다 부서졌다.
장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고 처자식을 볼 낯도 없었다. 참다못해 일자리를 요구하며 여러 곳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이 시위를 조종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932년에는 1만 명이 넘는 퇴역군인들이 워싱턴에 모여
연금을 미리 달라며 시위를 벌이는 일까지 일어났다. 현대산업은 알라딘이 호리병에서 불러낸 말 잘 듣는 거인과는 사뭇 달랐다. 자본주의 선진국
정치지도자들과 국민들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경제제도와 거대산업이 콧잔등을 후려치자 어쩔 줄 모르고 비틀거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공황은 미국에만 머물지 않고 온 세계로 퍼져 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 기업은 유럽 여러 나라에 많은 자본을 투자하여 해마다 엄청난
무역흑자를 올렸다. 유럽 여러 나라에 많은 자본을 투자하여 해마다 엄청난 무역흑자를 올렸다. 유럽 산업국가들은 이 빚을 갚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수출을 장려했다. 그런데 대공황이 미국경제를 덮치자 미국 사람들은 유럽 상품 수입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투자도 더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유럽 나라들도 달러가 없어 미국 상품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모든 나라가 똑같은 무역정책을 들고 나왔다. 자기 나라 시장 문을 닫아걸고 관세를
높이면서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시장을 열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수입과 수출이 균형을 이루어야 국민경제에 좋다는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어떤 나라도 자기와 거래하는 모든 나라에 대해 수입 수출액을 맞출 필요는
없다. 그저 총액만 비슷하면 된다. 그런데도 미국과 유럽 산업국가들은 사정이 다급해지자 무역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 하나 하나에 대해 수출입 액수를
맞추려고 했다. 이른바 '두 나라 사이 무역수지 균형'을 추구하는 정책이었다.
이렇게 되니 국제 무역전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수출을 늘리려고 애쓸수록 전체 무역 규모는 그만큼 더 줄어들었고 세계경제는 더
깊은 불황에 빠져들었다.
1930년대 불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몇 가지 통계수치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1923년에서 1925년 사이 평균 지수를 100으로 잡고 비교하면 1933년
미국 공업생산은 60, 건축은 14, 고용은 61, 노동자 임금은 38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실업자는 1930년 300만이던 것이 1933년에는 1,500만을 넘었다.
국민총생산액은 1928년 850억 달러에서 1930년 680억, 1932년에는 370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가 다 그랬다. 세계 공업생산액은
1925__29년 평균을 100으로 할 때, 1929년 이사분기에는 113.1이었지만 1932년 삼사분기에는 65.9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세계 무역량은 70%가 넘게
줄어들었고 실업자는 5,000만 명을 넘어섰다. 말 그대로 대공황이었다.
케인즈 혁명
대공황은 수억 인류에게 끔찍한 굶주림과 절망을 안겨 주었다. 그 이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산업국가를 이끌어 온
정치가와 자본가들만은 자본주의가 '영원한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각자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만 하면 그것을 사회의 번영으로 이끌어 준다던 '보이지 않는 손'은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기적 욕망과 자본주의 경쟁은 사회의 생산력을 높이는 데는 큰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자유방임시장은 그렇게 해서 생산한 재화를 지혜롭게
나누어 쓰는 일에는 눈 뜬 장님이나 한가지여서 사회는 거대한 늪과 같은 불황 밑바닥으로 자꾸만 가라앉았다.
아담 스미드가 처음 찾아냈고 그 뒤를 따른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신의 손'이라고까지 예찬해 마지않았던 '보이지 않는 손'은 사실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뉴욕, 동경, 서울과 같은 거대도시에서는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매일 아침 신선한 우유를 마시고 잉크 냄새 풍기는 신문을 읽는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이 먹고 살 야채와 식료품이 이 도시들에 들어오고 누군가가 그들이 살집을 짓는다. 여러 가지 말썽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누가 명령하지
않는데도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그런 대로 잘 돌아간다.
모든 경제체제는 몇 가지 핵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즉 어떤 재화를 어떤 방법으로 얼마만큼 생산해서 어떻게 나누어 가져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정부가 계획을 세워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이 과제가 저절로 해결된다. 자본가는 제한된 자본으로 되도록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 시장에서 잘 팔리는 물건을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으로 생산한다.
소비자는 제한된 소득으로 되도록 큰 만족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재화를 산다. 모든 개인이 오직 자기의 이익을 위해 생산하고
소비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사회 전체가 번영하도록 이끌어 준다. 어떤 상품이 너무 많이 오르면 그 상품이 소비자가 원하는 것보다 적게 생산되었다는
신호이다. 그러면 자본가는 생산을 늘리고 더 많은 자본가들이 그 사업에 새로 뛰어든다. 상품의 가격변동을 통해 소비자와 생산자는 시장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어 소비와 생산계획을 조정한다. 노동의 가격은 임금이고 자본의 가격은 이자이다. 모든 소비자와 생산자가 모두 나름대로 가장 큰 만족과 높은 이윤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생산 활동 전반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손의 축복'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성'이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지닌
가장 큰 약점은 돈 가진 사람에게만 싹싹하고 친절하다는 것이다.
부잣집 마나님 은 아무리 지독한 불경기에도 목욕하는 데 쓸 우유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집 담벼락 아래서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 거지 소년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이 축복을 내리지 않는다. 아무리 절박하게 우유를 원하더라도 돈이 없으면 헛일이기 때문이다. 자유시장은 사람들의 '필요'가 아니라 돈으로
뒷받침하는 '수요'에 대해서만 알은 체를 한다. 그래서 상상력이 풍부한 사상가들은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거지 소년과 같은 상황에 빠지게 되면
우유회사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대공황이 닥치자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럽지만 대공황이 일어나기 전까지 경제학자들은 상품이 너무 많이 생산되어 팔리지 않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반세기나 앞서 "노동자계급이 점점 가난해지는 가운데 생산력은 빠르게 발전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심각한 과잉생산공황에 빠질 것"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학설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 신념"이라고 비웃었다. 1870년대 이후 유럽 산업국가는 약 10년마다 심각한 불황을 경험하곤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집불통이었다. 세이가 "상품은 상품에 대해서 출구를 열어 준다."는 소위 '판로설'을 내놓은 뒤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머리에는 "공급은 같은
크기의 수요를 만들어 낸다"는 미신이 십계명처럼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어떤 상품이 한때 너무 많이 생산될 수는 잇다. 그러면 이
상품은 값이 떨어져 소비자들은 값이 비싼 다른 상품 대신에 이것을 더 많이 사게 되고 생산자들은 생산을 줄인다. 그리고 구하는 것보다 적게
생산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상품은 값이 올라 수요가 줄고 공급은 늘어난다.
이렇게 해서 수요와 공급은 균형을 회복한다. 따라서 모든 상품이 너무 많이 생산되는 전반적 과잉생산이란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실업문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실업자가 늘어나면 임금이 내려가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더 많이 고용하게 되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도 저절로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업이란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생기는 현상이거나 노동자들이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실업자는 게을러서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거나 분수에 넘치게 많은 임금을 받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욕심꾸러기들이다.
대공황이 콧잔등을 후려쳐도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미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세계에서 제인 유명한 경제학자로 손꼽던 어빙 피셔는 세계경제가 곧
불황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진단했는가 하면 미국 대통령 후버는 경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1932년에 벌써 공황이 끝났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희망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갔다. 미국 물가지수는 1926년을 100으로 할 때 1933년에는 65.9를 기록했다. 그러나 물가가 이렇게 내려도
상품은 여전히 남아돌았다.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무언가 색다른 주장을 한 경제학자 케인즈의
말에 귀기울이기 시작했다.
케인즈는 철두철미 자본주의를 옹호한 보수주의자였지만 불황과 실업이 자본주의가 안고 태어난 고질병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믿음을 거두어 들였다. 그래서 그는 1936년 세상에 내놓은 "고용, 이자와 화폐의 일반이론"이라는 책에서 자본주의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이
고질병을 다스릴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았다.
케인즈는 국민경제가 균형을 이룬 가운데서도 실업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이론으로 증명하였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일하고 싶어하고 일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오랫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은, 그들 자신만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경제체제와 사회제도의 결함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케인즈의 이론을
한마디로 줄여 말하자면 유효수요, 다시 말해 화폐의 뒷받침을 받는 수요가 부족해서 생산설비와 노동력이 남아도는 불황이 생긴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생산능력은 큰데 사람들이 돈이 없어 소비를 못해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에 따라 그는 별로 어렵지 않은 처방을 내렸다. 사람들이 소비할 능력이 모자라니 정부가 나서서 대신 소비해 주라는 것이었다. 정부가
앞장서서 도로를 닦고 병원을 짓고 발전소를 지으면 많은 노동자들의 소득이 되며 그들은 이 돈으로 빵과 옷과 땔감을 산다. 그리고 그들이 지출하는 돈은
기업으로 흘러 들어가 소비재를 만드는 자본가와 거기서 일하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이윤과 임금을 안겨 준다. 공장이 장 동아가면 기업가는 새
기계와 원료를 주문하고 공장을 넓히게 된다. 그러면 기계를 만들고 공장을 짓는 생산재 산업도 덩달아 활기를 찾고 그 분야 자본가와 노동자도 새로운
소득을 얻는다. 모든 사람이 더 많은 소득을 올리면 소비가 늘어나고, 소비가 늘어나면 소비재 산업이 번창하며 당연히 생산재 산업도 살아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부 재정지출을 늘리라는 것인데, 케인즈는 우스개를 좀 섞어 이런 처방을 내렸다.
재무부가 헌 병에 돈을 가득 채워 폐광에 적당히 묻고 그 위를 도시에서 나온 쓰레기로 덮은 다음, 많은 시련을 겪은 자유방임주의에 따라 사기업으로
하여금 그 돈을 다시 파내어 쓰게 한다면 ... 더 이상 실업이 있을 필요가 없다.
... 주택을 짓도록 한다면 더욱 현명하다고 하겠다. 정치적으로 실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들은 케인즈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완전한 자유경쟁 또는 자유방임주의라는 '신앙'에 따르자면 정부가 경제에 간섭하거나 개입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은 공산주의 선동가들이나 주장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케인즈는 기자들에게서 혹시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케인즈는 주식투기를 귀신같이 해치워 돈을 많이 번 뛰어난 장사꾼이자 여러 사람의 머리를 한데 모아도 모자라는 천재였다. 고급 포도주와 발레 따위의 귀족 취미를 자랑삼는 부르주아였으며 "자본론"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그것이 경제학에는 쓸모가 없다고 단정해 버릴 정도로 지독하게 공산주의를 싫어한 인물이었다.
기업가와 산업국가 정치지도자들은 케인즈를 의심하고 냉대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금방 젊은 경제학도들을 사로잡았고 그리 오래지 않아 미국과
유럽 자본주의 경제학계를 정복했으며 모든 나라 경제관료들을 추종자로 만들었다. 자유방임주의와 보이지 않는 손에 파산선고를 내린 것이다. 케인즈는
이론가로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새로운 사상체계를 세우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케인즈가 낡은 자유방임주의를
무너뜨린 것을 두고 '케인즈 혁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분명 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나라 치고 케인즈가 권유한 재정정책을 쓰지
않는 나라는 없다.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공산주의라고 욕하다가는 웃음거리가 된다. 혁명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케인즈가 엄청나게 큰 일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루즈벨트와 히틀러
대공황은 그 자체만으로 세계를 뒤흔든 비극이다. 그러나 그 뒤를 밟고 따라와 또 한차례 세계를 불바다로 만든 제2차 세계대전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다. 세계 자본주의 열강은 대공황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무역전쟁을 벌이다가 군비경쟁으로 나아갔고 끝내는 원자폭탄까지
터뜨리면서까지 서로 죽이고 죽는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보이지 않는 손은 국제무역을 일찍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큰 혼란에 빠뜨렸다. 모든 산업국가들이 남아야 어떻게 되든 간에 혼자만이라도
대공황에서 빠져 나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너나없이 더 깊은 골짜기로 떨어져 갔다. 산업국가들은 서로를 불신하면서 다른 나라에 투자했던
자본을 도로 빼오는 한편, 자기가 가진 외화를 금으로 바꾸어 나라 안으로 가지고 왔다. 당시 금본위제도에서 지폐는 은행에서 금으로 바꿀 수 잇는
이른바 태환 지폐였다. 국제금융질서가 무너져도 국제거래에서 지불수단으로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금이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강대국 사이에는 때아닌
중금주의 무역전쟁이 일어났다.
1931년 9월, 영국 정부가 견디다 못해 파운드화를 금으로 바꾸어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서자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도 무너진 적이 잇는
금본위제 국제금융질서는 또다시 붕괴하고 말았다. 서로가 다른 나라 화폐를 믿을 수 없어서 물건값을 금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세계 금 보유량은
국제무역을 뒷받침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세계무역량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자본주의 열강은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장벽을 높이고
경기를 북돋우기 위해 여러 가지 통제정책을 폈다. 영연방 국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932년 오타와에서 회의를 열어 연방과 식민지를 블록으로 묶어 그
내부에서는 자유무역을 하면서 다른 나라 상품에 대해서는 높은 수입관세를 물리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다른 나라들도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세계는
파운드, 달러, 마르크, 프랑 등, 같은 화폐를 쓰는 제국주의 종주국과 식민지를 묶은 여러 블록으로 나누어졌다. 무역전쟁이 치열해지면서 국제관계가
험악해지자 강대국들은 다가올 전쟁에 대비한 군사력 경쟁으로 들어갔다.
국제연맹은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전략하였다.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겨우 20년 만에 끝장이 나고 만 것이다.
국제관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산업국가 노동자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과 실업을 증오하면서 과격한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휩쓸려들었다. 전세계
식민지 종속국 민중은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날아갈수록 맹렬하게 민족해방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 투쟁을 이끈 지도자들 가운데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점점 늘어갔다.
제국주의 정부들은 사회주의 혁명운동과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자본주의 산업국가 정부들은 자기네가 민주주의를 하는 문명국가라고 늘 자랑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어느 정도 조화로운
동반자처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공황은 그 둘 사이에 깊은 골짜기를 파놓았다. 제국주의 정부들은 식민지에 자본주의를 옮겨 심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민주주의는 한 조각도 나누어주지 않았다. 나라 안에서 일어난 혁명운동을 진압하는 데 민주주의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달래자면 자본주의체제를 많든 적든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민주주의가 그나마 제대로 자리잡고 있던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는 정부가 개입하여 자본주의를 손질했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처럼 뒤늦게 자본주의
산업발전을 시작한 나라에서는 막 싹터 오르던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국가이익이라는 이름아래 오직 자본가계급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파쇼체제가
등장하였다.
히틀러는 케인즈 경제학에 대해서 뭔가 아는 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권한 바로 그런 정책을 제일 먼저 실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진
탓으로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짊어진 독일 경제는 대공황이 덮치자 돌이킬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불만을 틈타 '위대한
독일제국 부활'이라는 환상을 부추김으로써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그는 제일 먼저 유태인을 쫓아내고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체포했으며 나중에는
노동조합 간부와 자유주의 지식인, 심지어는 독재를 비판하는 신부와 목사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였다. 군인과 경찰 수를 늘리고 경찰서와 교도소를
짓고 군수품 공장을 세우고 도로와 비행장을 닦았다. 이렇게 재정지출을 확대함으로써 케인즈가 말한 '유효수요'를 만들어 낸 것이다. 히틀러 식
경제정책은 큰 효과를 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실업자가 사라졌고 독일 경제는 대공황이라는 긴 동굴을 제일 먼저 빠져 나왔다. 일본도 비슷한 정책을
펴면서 중국대륙을 침략함으로써 불황에서 벗어났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히틀러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루즈벨트는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자본가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데도 이른바
'뉴딜정책'을 집행했다. 미국 정부는 테네시 계곡에 큰 댐과 발전소를 세우고 곳곳에서 건설사업을 일으키는 한편 독점을 규제하는 법률을 강화하고
임금협상에도 간섭했다. 미국이나 영국 정부가 이렇게 온갖 일에 돈을 투자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대공황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져 군수물자를 생산하는데 밑도 끝도 없이 돈을 쏟아 붓지 않았다면 아마도 대공황은 1940년대까지 꼬리를 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탱크와 전투기를 아무리 많이 생산해 보아야 국민생활이 나아질 리 없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식민지의 자원을
쥐어짜며 버텨 나갔다. 그러나 나라가 작아 자원과 시장이 모자라고 변변한 식민지도 없었던 독일과 일본은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다시 한번
약한 나라를 침략하거나 다른 나라 식민지를 빼앗기 위해 침략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이번에는 유럽대륙만이 아니라 중국대륙과 태평양까지도 전쟁터가
되었고 수천만 명의 생명과 건강과 재산이 화약연기 속에서 허망하게 사라졌다. 잿더미가 된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군대가 점령하였고 일본은
몇십 배나 큰 나라인 미국에 대들었다가 두 도시가 미국 원자폭탄 위력 실험장이 되는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대공황이 남긴 것 경험은 바보에게도 가장 좋은 학교이고 필요는 발명을 낳는 법이다. 인간은 대공황 때문에 크나큰 고통을 당했지만 많은 것을 배웠고 다시는 그런 비극을 겪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대공황은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믿음과 자유방임주의 경제이론을 무너뜨렸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많은 장점을 지녔지만 그에 못지
않는 결점도 있기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들꽃처럼 번성하는 제도가 아니라는 교훈을 배웠다. 자본주의는 곁가지를 쳐 주고 바로잡아 주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는 온실 안의 꽃과 같은 불완전한 제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나라들은 '보이지 않는 손'을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정부의
보이는 주먹'도 함께 갖추게 되었다.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한 미국 정부는 연방준비제도라는 중앙은행체제를 만들어 통화량과 이자율, 물가수준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또 여러 가지
보험제도와 법률을 정비하여 대공황 때처럼 은행이 한꺼번에 파산하거나 시민들의 예금통장이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선진
산업국가에서는 어디서나 소득이 높을수록 세율이 높아지는 누진세제도를 확대하고 실업보험과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여 불경기에도 최소한의
소비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누진세제도 아래서는 호경기에 소득이 늘어나면 자동적으로 세율이 높아져 세금이 소득보다 더 빠르게 늘어나고 소비
증가는 누그러진다. 불경기에 실업자가 늘어나면 저절로 세금수입이 줄어드는 반면 실업보험금은 더 많이 지급되기 때문에 소비가 너무 빨리 줄어드는 것을
막아 준다. 그래서 이런 것을 두고 경기변동을 누그러뜨리는 '자동안정장치'라고 한다.
산업국가 지배층은 자유방임시장이 분배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인정했다. 사회집단 사이에 소득격차가 너무 커져 국민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면 사회질서를 뒤집어엎으려는 혁명세력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사회는 안정을 잃고 만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나 똑같은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의무교육제도를 확충했다. 그리고 헌법과 법률로 힘이 약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사용자와 단체협상을 하고 파업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였다. 독점대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면서 소비자를 착취하지 못하도록 독점금지법과 공정거래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는 필요하지만
사기업이 투자하기 어려운 교통, 전신전화, 도로건설 따위의 공공산업, 무역에 대해 정부가 전혀 손을 대지 않는 자본주의 나라는 하나도 없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자본주의라는 말을 이제 적당하지 않으니 복지국가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그보다 '수정자본주의'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모두가 저 혼자만이라도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다가 국제무역 전체를 망치고 전쟁으로 치달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전쟁이
끝난 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을 만들어 국제금융질서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만들어 '공정한 국제거래질서'와 자유무역은 뒷받침하려고 했다.
대공황은 기억하기 싫을 만큼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어쨌든 지난 일이 되었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그 정도로 심각한 공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가능성마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양상은 다르지만 경기변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경제학자들이 그 원인을
시원스럽게 밝혀 낸 것도 아니다. 케인즈 식 처방도 낡아 버렸다. 케인즈 이론에 따르면 불황 때는 물가가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어느 나라
정부나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현상 때문에 골치를 썩인다. 흔히 말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케인즈가 준 처방을
믿고 쓸 수 없다. 불황이라고 재정지출을 늘렸다가는 물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공황은 그 힘이 전보다 많이 약해졌지만 아주
죽어 버리지는 않았다.
국제무역도 여전히 말썽거리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은, 당연한 일이지만, 자본금을 댄 몇몇 강대국 손아귀에 들어 있다. 자유무역이 좋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부자와 가난뱅이가 뒤섞여 사는 국제사회에서는 얹나 선진국이 저개발국을 협박하는 무기로 쓰인다. 선진국들은 중요한
핵심산업분야에서 자유무역을 요구한다.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후진국이 생산한 소비재를 수입해 주지 않겠다고 협박한다. 이렇게 나가면 아마도 지금
뒤 처진 나라는 영원히 '별 볼일 없는 소비재'나 생산하면서 높은 기술이 필요한 상품은 언제나 턱없이 비싼 값을 주고 사다 쓰는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자본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사회의 생산능력을 눈부시게 발전시켜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대공황과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경기변동은 인간이 이 제도를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대공황은 사람들이 인간을 위해 상품을 생산한다는 명백한 진리를
망각하고 마치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양 자본주의의 장점에만 도취되어 있던 바로 그때 세계를 덮쳤다. 만약 인간이 자기가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하는 제도를 아무 비판 없이 예찬하고 무작정 섬기는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또다시 대공황과 같은 재앙을 불러들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이야말로 대공황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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