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팔만대장경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2007년 지정!
팔만대장경 조판 완료 760주년
팔만대장경 축제(2011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
팔만대장경판 가치와 의의,
진본은 100년 후 재공개 예정!
부처님이 태어난 인도에서는 아주 많은 것을 '팔만사천가지' 라고 한다.
그래서, 끝 없는 인간의 번뇌를 '팔만사천 번뇌' 라고 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팔만사천 법문을 수록한 것이 바로 '팔만대장경' 이다.
인쇄술의 발달은 인류 문명사에 있어 서적의 대량 유통을 통한 지식과 정확한 정보의 확산을 가져오면서 세계를 근대화시키는 '정점' 이었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본과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한국은 인쇄 문화의 종주국으로 일찍부터 인쇄술에서 세계를 '선도' 해왔다.
[팔만대장경이란?]
서기 1011년!
고려 현종은 북방에서 거란족이 수시로 침입하자 '부처의 힘' 으로 이들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 초조대장경을 만들었다.
70여년에 걸쳐 6000여 권이 완성됐으나, 약 200년 뒤 몽골의 침입으로 모두 불탔으며, 이후 초조대장경을 기반으로 새로운 대장경이 완성됐다.
전체 무게 280t. 8만1,258개의 목판에 새겨진 글자만 5200만자. 바로 '팔만대장경' 이다.
판수가 팔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 을 실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 한다.
이는 의천(義天)이 만든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략으로 소실되자 다시 만든 것으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도 하는데,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자!'
라는 취지로 고려때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으로 고려 때는 물론이고 조선 초에도 인쇄되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초조대장경을 만드는 데에, 길게는 77년이나 걸렸다는 설이 있지만, 재조대장경은 '16년' 만에 완성됐다고 한다.
팔만대장경은 '세로 24cm, 가로 84.6cm, 두께 3.2cm' 의 크기로 판의 끝에는 경(經)의 이름, 권수(卷數), 호수(號數)가 기록되어 있고 천자문으로 함호(函號)를 새겨 놓았다.
[팔만대장경판 가치와 의의]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자랑할 만한 팔만대장경은 1251년에 완성되어 1962년 12월 '국보 32호' 로 지정되었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목판이 8만 1258판으로 최근 해인사 대장경판 보존관리시스템 구축사업을 통해 경판의 수가 81,350판으로 조사되었으며,
이에 대한 경판의 수량에 대해서는 별도의 정밀조사와 연구를 통해 규명할 예정이라고 한다.
전체의 무게가 무려 '280톤' 으로, 8만 1258판을 전부 쌓으면 약 3200미터 높이로 백두산 (2744m)보다 높으며,
길이로 이어 놓는다면 150리(약 60km)나 되는 엄청난 양이다. '경판 한 장' 의 무게는 3∼4㎏으로 전체 무게는 280여톤,
2.5t 트럭에 실으면 112대 분량이며, 1명이 6∼7㎏을 머리에 이고 옮겼다면 4만여명의 이운 인력이 필요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팔만대장경을 '제작' 하기 위해 산벚나무와 돌배나무 등 1만∼1만5천그루를 벌채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경판 한 장에 사용된 옻의 양은 약 5g으로 전체 소요량은 40만6천290g으로 옻나무 40만그루를 베어야 칠할 수 있는 양이다.
이 대역사에 동원된 '인원' 은 20만∼50만명으로 추산되고,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의 인구와 맞먹는 숫자로
고려의 총 인구가 약 300만명이었고, 몽고와 전쟁 와중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실로 엄청난 규모의 인원이 동원됐음을 알 수 있어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방대한 분량은 물론, 질적으로도 아주 우수한데, 마치 숙달된 한 사람이 모든 경판을 새긴 것처럼 판각 수준이 일정하고 아름다워
조선시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는 그 글씨를 보고 “이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마치 신선이 내려와서 쓴 것 같다” 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또한, 오자나 탈자가 거의 없으며 근대에 만들어진 것처럼 상태도 아주 좋아 세계는 팔만대장경을 두고
“목판 인쇄술의 극치다”, “세계의 불가사의다” 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불교방송에서 초조대장경 조성 1천년 기념으로 제작한 팔만대장경판.
8만 여 장의 경판중 ‘반야바라밀다심경’ 을 맨 먼저 디지털로 복원함.
7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완벽한 목판본으로 남아 있는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목판대장경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삼장(三藏)' 을 집대성하고 내용이 정확하여 세계 각국에 전파돼 불교의 연구와 확산을 도왔다.
그렇게 불교문화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고려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은 그 우수성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2007년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 으로 지정되었다.
한국의 화목(花木)
바야흐로 벚꽃잎이 울려 퍼지는 4월이 왔다. 벚꽃이라 하면 많은 사람이 일본의 나라꽃으로 생각하며 미워하는 마음이 있기도 하지만 벚꽃의 자생지는 본래가 한국이다.
산벚나무, 왕벚나무, 섬벚나무, 털벚나무, 수양나무 등 종류가 많은데, 일본인의 국화는 왕벚나무이다. 일본에는 자생지가 없고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서 자생지가 확인되었으며, 독일학자가 자생지를 확인 정식으로 학계에 보고한 바 있기도 하다.이 중에서도 산벚나무가 바로 매화, 산수유, 생강나무 등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에 이어 아직 새잎의 푸름이 시작하기도 전에 온통 화사한 봄의 설렘에 젖어들게 하는 벚꽃놀이를 즐기도록 하는 수종이다.
벚꽃이라 하면 ’봄’을 생각하게 할 정도로 봄을 온통 홀로 독차지하며 뭇사람들의 마음을 간지럽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벚나무는 문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리 사랑받지 못했던 존재인 듯하다. 그 이유인즉슨, 그 많은 꽃과 나무를 글과 그림으로 표현함을 즐겼던 선조의 작품에서 벚나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신 벚나무는 서화(書畵)가 아닌 실질적인 부분에서 쓰임이 큰 수종이었다.
벚나무에 관한 기록
벚나무의 자생지가 우리나라 한라산과 지리산이라고는 하나, 옛 기록에서 벚나무에 관한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다. 조선 중기 문인이었던 정희득(鄭希得, 1575-1640)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3년을 지냈는데, 이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조선 후기 문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도 그의 저술서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여기서 청령국(??國)은 일본 땅이 잠자리(??)를 닮았다고 하여 부른 이름이다
조선시대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지은 어원 연구서 내용 중 일부이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옛날에는 벚나무 또는 멋나무라 했으며 열 배를 ’벗지’나 ’멋지(墨櫻)’라고 했고 제주도에서는 지금도 이를 ’사오기’ 또는 ’먹사오기’라 부른다.
여타 다른 꽃, 나무들과는 달리 전해져 오는 시나 그림은 없지만, 벚나무의 존재만큼은 확실시 해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궁재(弓材)로 쓰인 목재
벚나무의 재목은 탄력이 있으며 굳고 치밀하여서 썰매, 낫자루 등에도 이용되었으며 특히 활과 화살을 만드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재료였다.
조선조 인조대왕 때의 일이다. 효종임금이 왕자일 시절 병자호란을 겪고 중국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오게 된다. 이때 효종은 당시 치욕을 갚기 위해 북벌을 계획하며 병력을 기르고자 서울 우이동에 수양벚나무를 대대적으로 심게 한다. 이는 벚나무의 목재가 치밀하고 견고하여 활을 만드는 재료로 쓰임이 유용하였고, 또 올벚나무의 껍질은 다른 벚나무보다도 더 매끄러워 활에 감으면 손이 아프지 않아 활을 생산해내는 데 중요한 수종이었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효종은 이를 이루지 못하고 임종을 맞이했지만, 지금의 지리산 밑 구례 화엄사 경내에 있는 올벚노목이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우이동의 수양벚나무의 뜻을 본받아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심은 것 중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지금은 1954년 8월의 태풍에 나무중동이 꺾어져 버려 거목의 미관이 손상되었다.
이 외에도 수피는 다려서 민간약으로 널리 쓰였는데 두드러기, 쇠고기 체한 데, 기침을 멎게 하는 진해제 등 다방면으로 유용한 재료였다.
팔만대장경의 주재료 벚나무
팔만대장경은 11세기 초 고려 때 몽골의 침입을 받자 부처의 힘을 빌려 북방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불경을 목판으로 인쇄한 것이다. 본래는 고려 현종 2년(1011)부터 근 80여 년에 걸쳐 초조대장경이라 부르던 대장경판을 완성하였으나, 몽골군의 2차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팔만대장경을 만든 것으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도 한다.
위의 기록을 통해 1236(고종 23년) 대장경 조성사업이 다시 시작되어 16년 만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판 하나의 크기는 세로 24cm, 가로 84.6cm, 두께 3.2m에 이르며 무게는 2.2-4.8kg에 이른다. 이러한 것들이 팔만장에 이르니 그 규모만도 280톤가량이다. 여기 새겨진 글자만도 조선왕조 5백 년 간 실록의 전체 글자 수와 맞먹는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만하다. 글씨를 새기는 데만 동원된 연인원도 100만 명이 훨씬 넘고, 이 밖의 인력을 계산해 보았을 때 실로 엄청난 작업으로 팔만대장경을 만드는데 국가의 사활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이러한 팔만대장경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나무 재료의 우수성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은 산벚나무가 65%, 돌배나무가 15%, 이외 박달나무, 거제수나무, 단풍, 후박나무 등이 조금씩 섞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원래는 산벚나무가 아닌 자작나무로 오인하여 잘못 알려졌었으나 성분검사를 통해 자작이 아닌 산벚나무였음이 밝혀졌다.
산벚나무의 목재가 견고함은 이미 앞서 설명한 바 있으나, 팔만대장경 보존의 우수성은 목재 자체보다도 그 기술성에 있었다. 대장경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인 벚나무를 우선 3년간 바닷물에 담가둔다. 그다음 널빤지로 만들어 소금물에 찐 후 그늘에 말려 대패질을 하는데 이는 경판이 오래되어 뒤틀리거나 갈라지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 과정이다. 이후, 경판이 다 새겨지면 봄이 슬지 않고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옻칠을 하고 네 귀퉁이를 구리판으로 장식하였는데 이러한 기술들이 바로 대장경판이 오래도록 지속하게 한 기술의 우수성이라 하겠다.
팔만대장경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일제강점기 벚꽃 문화의 이식
그렇다면 이렇듯 세계문화유산의 주재료가 될 정도로 주변에 친숙하게 심어졌던 벚나무가 우리에게 왜 미움을 받는 ’일본의 나무’로 자리매김한 것일까.
위는 1929년 조선매일신문사 출판부에서 발행한 안내 책자에 실린 소갯글이다. 1911년 4월 26일에는 그 박물관과 동물원 식물원을 통칭하여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궁(宮)’이란 왕과 왕실이 사는 곳을 가리키지만 ’원(苑)’이란 사냥이나 야유 등 놀이를 하는 곳이란 뜻으로 그 격을 낮추고자 한 일본의 의도가 숨겨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소개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은 이곳에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고 1924년부터는 밤에도 개장해 벚꽃놀이를 즐기도록 했다. 이때의 벚나무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통치를 쉽게 하는 도구로 사용된 셈이다. 본래 역사적으로 벚꽃 문화가 없었던 우리나라는 이렇듯 일제강점기에 의해 이식된 문화로, 지금의 벚꽃에 대한 반감은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다행히, 1980년대 초까지 이어지던 창경원 밤 꽃놀이는 청산되었고 이곳의 벚나무들은 국회의사당이 있는 여의도 윤중로로 옮겨져 새로운 벚꽃 놀이의 명소가 되었다. 이제 곧 흩날리는 벚꽃 비를 맞고자 많은 이들이 여의도로 모여들 터이다. 벚나무 자체를 감상하는 것을 질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벚나무는 당당히 한국을 자생지로 하며 뿌리를 이곳에 두고 있으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을 만들어낸 나무이다. 그러나 지금의 벚꽃놀이가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의 정신을 자신들의 것으로 젖게 하려던 도구로 사용된 그 근간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진해 군항제는 매년 이맘때쯤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림과 동시에 시작되는 잔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항일정신을 이어받고자 벚꽃이 흩날리는 길에서 충무공의 승전 행진을 재현하며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것은 붙지 않는 같은 극끼리의 자석을 붙여놓은 꼴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전통 속에서 벚나무는 ’감상’이 아닌 ’실용’에 바탕을 둔 고마운 나무였다. 이를 알고 찾는 벚꽃놀이라면 이번에는 떨어지는 벚꽃 한 잎 한 잎이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해상록(海上錄) 해상록(海上錄) 제1권 기해년(1599, 선조 32) 1월27일
회백과 중겸을 이끌고 천수(天?)의 절에 가 보았다. 이름이 예천원(醴泉院)인데, 샘은 맑고 돌은 고괴(古怪)하며, 화초가 탐스럽고 고와, 도무지 잡티가 없었다. 천수는 시승(詩僧)이며 대마도의 큰 인물이었다. 조용히 살며 산 밖을 나가지 않고 스스로 고승(高僧)이라 자처하는데, 나를 보더니 정겨웁게 대접했다.
해상록(海上錄) 해상록(海上錄) 제2권 시(詩) ○ 칠언율시(七言律詩)
예천원(醴泉院)의 천수(天?)에게 부치다
금년 봄도 지난해의 봄과 같아서 / 今年春似去年春
강풀과 시내 꽃 비 맞아 싱그럽네 / 江草溪花得雨新
멀리서 상상하니 고향에도 봄이 또 깊어 / 遙想故園春又晩
봄 찾아 꽃 구경하는 사람 아마 있으리 / 探春別有看花人
천수의 차운
꽃이 붓 끝에 저국공001]의 봄에 피어 / 花發筆頭楮國春
문장의 글자마다 금옥처럼 새로워라002] / 文章字字玉金新
시를 보니 재주와 지혜 어느 정도인 줄 알겠거니 / 見詩才智知多少
오색 구름 타고 내려온 신선인 것 같네 / 想像五雲天上人
객지의 광음에 봄이 반쯤 지났거니 / 客裏光陰欲半春
산 매화와 시내 버들 한꺼번에 새롭구나 / 嶺梅溪柳一時新
고향의 친구들 이젠 모두 죽어갔으리니 / 故園親舊凋零盡
부상에서 죽지 못한 사람을 그 누가 생각해 주리 / 誰憶扶桑未死人
중원의 차운
타향의 나그네로 다시 봄을 만났는데 / 他鄕作客再逢春
꽃다운 풀 기이한 꽃 나날이 새로워라 / 芳草奇花日日新
봄은 스스로 오가는데 사람은 못 가니 / 春自去來人未去
하늘은 무슨 일로 나그네 마음 저버리나 / 天公何事負羈人
[주D-001]저국공 : 종이의 별명. 《찬이기(纂異記)》에 “설직(薛稷)이 종이를 만들고서 구석(九錫)에 봉(封)해지고 저국공 백주 자사(楮國公白州刺使)를 배(拜)했다.” 하였다. 《事物異名錄 文具 紙》
[주D-002]문장의 글자마다 금옥처럼 새로워라 : 이태백(李太白)이 젊을 때에 꿈에 꽃이 피는 것을 본 뒤로부터 천재(天才)가 뛰어나게 되어 이름이 천하에 퍼졌다 한다. 《開元天寶遺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청장관전서 제65권 청령국지 2(??國志二)
기목(奇木)
왜인의 풍속은 앵화(櫻花 사꾸라바나 벚꽃)를 중하게 여기는데, 앵(櫻)은 산앵(山櫻)이니, 곧 화(樺 벚나무)이다. 나무 높이는 두세 길이고, 꽃은 보통 백색인데 자색 꽃도 있으며, 홑 꽃잎의 것과 겹 꽃잎의 것이 있다. 온갖 꽃 중의 어른으로 여기므로, 이름을 가리켜 부르지 않고 그저 화(花 하나)라 부른다.
비(榧 가야 비자나무)는 대화(大和 야마도)의 길야(吉野 요시노)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은데, 그 나무를 태우면 모기를 쫓을 수 있으나 지네를 오게 한다.
패왕수(?王樹 선인장)가 곳곳에 있다. 가지와 잎의 분별이 없으므로, 줄기인가 하면 가지이고, 가지인가 하면 잎이고, 잎인가 하면 열매이다. 한 잎[枚]의 길이는 일여덟 치이며 타원형이고 넓적하며, 짙은 녹색이고 안팎에 흰 털이 있다. 3월ㆍ4월에 거듭 돋아서 서른 잎이 되고, 여름에는 꽃이 피는데 홑잎 국화를 닮고 황금색이다.
번초(番蕉)는 형상이 봉미초(鳳尾蕉)를 닮았으며, 말라 죽어 갈 때에 뿌리에 못을 박으면 살아나므로 왜인이 소철(蘇鐵)이라 부르며, 유구(琉球)에서 나는 것인데 지금은 곳곳에 있다. 거죽에 늙은 소나무 껍질 같은 인갑(鱗甲 비늘 모양의 딱딱한 껍질)이 있고, 꼭대기에는 광랑(??) 같은 잎이 난다.
종려(?櫚)는 잎의 길이가 두세 자이며, 나무 한가운데에 흰 가루가 있는데 떡을 만들어 먹으면 요기할 수 있다. 화천(和泉 이즈미)의 계(堺 사까이)에 있는 묘국사(妙國寺)에 한 그루에서 열일곱 줄기가 나고 높이가 한 길 대여섯 자 되는 것이 있다.
번초(番椒 고추)는 남만(南蠻)에서 나는 것인데, 불[火] 성질이어서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불기운을 일으켜 종기가 생기고 낙태하며,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 나그네에게 주면 발에 생긴 물집이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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