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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서 추적하는 거대한 역사
의식주를 통해본 중국의 역사
우리나라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중국. 의식주라는 세세한 모습에서 오천년 중국의 방대한 역사를 설명해 준다고 하니 그 제목에서 일단 흥미를 끌었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중국 역사에 대해 몰랐던 부분들과 오해하고 있던 점들, 그리고 의외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다.
식 - 밥이 하늘이다.
식욕은 인간이 지닌 가장 본능적인 욕구 중 하나이다. 중국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신토불이 개념을 가지고 살아온 민족이다. 고대부터 농경생활을 시작함으로써 우리와 비슷한 식생활을 했었다. 공자의 고향인 산둥지방이 우리나라와 가장 인접해 있고 지형과 기후조건도 비슷하다. 황해를 끼고 있어서 물산이 풍부하다. 겨울이 길어서 배추잎을 넣은 탕 요리가 발달했다. 우리가 즐겨먹는 자장면의 자장은 산둥 성에서 기원했다. 이는 지방마다 주변 환경에 의해 식생활의 특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각 지역의 특색이 살아있는 다양한 음식들이 존재하듯이 중국 역시 각 지역의 지형과 기후조건, 민족의 성향 등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요리들이 존재한다. 바다 주변의 지역은 생선요리를, 추운 지역에는 체력을 보충해 주는 스테미너요리 등 다양하다.
나는 단순하게도 지금까지 각 지역의 특색 있는 요리들은 단순히 그 민족 집단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생각해 왔었다. ‘귤이 회수를 지나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주변 환경이나 기후 조건 등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의 각 지방색이 뚜렷한 음식들이 왜 그런 재료와 요리법을 사용했었는지 이해가 됐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음식들은 단순히 지역의 성격차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넓게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요소들의 영향을 받아왔다. 특히 중국인들이 중요시 하는 음양오행사상을 말할 수 있다. 우주는 음과 양의 융합과 조화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듯이 음식의 성질과 조화로운 섭취도 중요시하였다. 중국은 병이 생기는 원인을 음식을 조화롭지 못하게 먹은 것이라고 여겨온 것도 이러한 사상에서 비롯된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는 과학적이지 못한 사실들을 그저 민간요법쯤으로 치부하여 무시해 온 경향이 있다. 언젠가 미국 TV 쇼프로그램에서도 그들은 음양오행사상을 전혀 모르고 동양 의학에 대해서 그저 신기하다 며 마치 마술쇼를 보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이 책에서는 서양에서는 과학적인 근거로 인한 발달과정을 겪어왔다고 했는데 이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양의 조화라는 것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도 치킨을 먹을 때 무를 같이 먹는데, 이 역시 조화라고 볼 수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들어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온 전통이다. 고대 중국에선 현대에서 말하는 식품영양학이란 개념이 없었어도 음식 섭취를 통해서 질병을 고치는 민간요법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에는 쉽게 구할 수 있고 제한을 두지 않는 식재료를 나라에서 법으로 제한을 뒀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식용 고기는 소, 돼지, 염소, 양이었다. 식재료이면서 농기구인 소를 도살하는 것을 나라에서 제한했다고 하는데, 당시 고기뿐만 아니라 농사짓는 것도 살아가는 데 큰 의미 있는 일이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다. 고기는 일반인이 쉽게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웰빙시대에 사는 우리는 원하는 음식을 누군가에 의해 제지받아가면서 못 먹게 되지는 않는다. 음식 때문에 감정이 상해 싸움이 일어나고 나라의 큰 문제가 왔다갔다 하기까지 한 고대 중국 역사을 보면 당시 ‘겨우 음식 따위로’ 라는 표현으로 결코 얕잡아 볼 문제가 아니었다. 또한 우리처럼 소금 생산을 중시하며 음식에서 중요시 여겼다.
중국 음식의 특징은 불에 익히는 것과 차를 식전에 마시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술문화는 우리와 비슷하다. 적당히 마셔야 하는데 정치까지 악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공자가 애주가였다는 일화가 흥미로웠다.
의 - 비단의 나라 중국
중국 옷의 재료는 각 지역의 특징과 사회 신분제도와 관련이 있다. 왕족이나 귀족에게는 비단이 최고였고 동물 가죽은 싸구려였다. 이 점이 우리랑 차이가 있다.
중국의 패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전족이다. 역시 책에서도 전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여러 나라마다 문화가 있고 전통이 있다. 나는 예전에 각 나라의 이해할 수 없는 전통에 대한 자료를 본 적이 있다. 특히 아프리카 쪽을 관련하여 예를 들어본다. 목에다 긴 목걸이를 연속해서 끼워서 기린처럼 보이게 하는 부족과 아랫 입술에 장식품을 끼우는 부족을 보았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무척 불편해 보이는데, 이것은 단순히 다른 나라와의 문화의 차이라고 인정해야 할까. 전족도 마찬가지이다. 헤일리 문화촌에 가면 전족 여자의 신발과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여자인 내 생각에 전족은 할례와 같이 없어져야 할 지구상의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문화이다. 여성 자신이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하고 그걸 바라보는 주변 남자들이 그 괴로운 모습을 즐긴다는 점에서 전족은 그저 특출(特出)하고 개성이 있는 전통 문화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데 그게 어떻게 자랑스러운 문화가 될 수 있을까?
두 번째로 흥미로웠던 점은 여성의 화장이었다. 고대 중국에서도 그랬듯이 지금도 많은 여자들이 시대적 유행과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화장을 하고 다닌다. 요나라에는 남성들의 헤어스타일이 있었고, 진나라에는 향낭이란 향수주머니를 찬 남성들이 많았다는 것, 고대부터 여성들의 화장 순서법이 나왔다는 것 등을 보면 중국도 멋을 즐기는 민족이다. 고대 중국에는 지금과 같은 다양한 화장품 브랜드가 없으니 당연히 화장을 안 하고 다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연지와 분을 비롯해 다양한 화장품이 있었고 그것이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의 화장품이 되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되니 화장품의 역사가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에선 신분이 높은 여인의 치장하는 모습을 따라하는 여자들이 많았다는 자료들을 보니 최근의 화장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모습이라서 신기했다. 마치 경극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 같았다. 이마에 묻은 꽃잎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이마에 무늬를 넣거나 부딪쳐서 피가 난 모습이 아름다워 핏자국 같은 화장을 한다는 것에서 문화의 차이를 느꼈다. 지금 유행하는 스모키 화장도 세월이 흐르면 이해할 수 없는 스타일로 인식이 될 것만 같았다. 신분이 높은 여성의 모습을 따라하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것은 당시에는 겉모습이라도 신분이 높게 보이며 더 잘난 사람으로 과시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유교이념이 약해진 수당시대에는 여성들이 화장으로 자신을 치장했었다. 지금은 상대방(남자)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보다는 자기 자신의 만족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꾸미려는 성향이 강한데, 중국의 당시 여성들은 남자에게 잘 보이려는 화장법을 했다는 것이다. 남자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걸음걸이에서 일부러 힘이 없는 척하거나 창백해 보이는 화장법을 쓰는 것에서 나는 그것이 강하게 느껴졌다. 다른 능력으로는 남자에게 잘 보일 자신이 없었을까. 내 눈에는 여자의 그러한 행동들이 자신의 가치를 헤프게 하는 것이라서 좋게 보이지 않는다.
住- 천자의 도시 베이징
이 부분을 읽어보면 중국인들의 주택 구조에서 생활방식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시 중국인이 살고자 하는 이상적 세계의 모습과 당시 사회 제도와 규범을 반영하고 있었다. 작가는 친절하게 고증적 자료(집 모양 구조 단면도)를 자주 인용하면서 이해를 돕고 있다. 집 구조에는 몽고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다. 중국의 남과 북에서는 자연환경이 다르기에 집 모양, 사람의 체형과 성격이 다르다.
북경 여행을 가보면 흔히 가는 코스인 자금성, 천단의 흰색 구단으로 된 계단, 경산공원 등에 대해 유래를 알려주는 부분이 있어서 새로운 역사 지식을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중국의 역대 도시는 대부분 성곽이 많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이다. 그만큼 중국인들은 추운 날씨에도 적응하느라 매우 강인한 적응력을 길러왔다는 것이다. 집 구조는 우리나라처럼 풍수지리설이 적용되고 가부장제 유교중심 사상이 배어 있는 대가족 중심의 사합원 구조로 되어 있다. 대문을 길한 방향인 정남향으로 배치했다. 북경은 겨울이 길고 춥기 때문에 보온을 위해 벽을 두껍게 하고 남북으로 긴 구조를 이루고 있다.
내가 오래 전 중국의 상해로 여행을 갔을 때에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집 구조의 하나는 강남지역의 사합원처럼 집 뒤에 배를 띄울 수 있는 운하가 있다는 것이다. 집안이 늘 습기가 차서 빨래를 밖에다 널어놓는 것도 진풍경이었다. 여하튼 중국의 역대 집 구조를 보면 여러 가지 신기한 것도 많다. 사람이 거친 자연환경에서 어떻게 머리를 쓰면서 적응하며 살아가는가를 보여준다. 역대의 도성의 변천사를 보면 시대가 오래될수록 수도의 위치가 북위에서 점점 내려가고 있다. 경제적 이유, 외침에 대한 대비책 등 많은 이유가 있다. 도성의 유적 중 우리 역사에서 잘 알려진 갑골문에 대한 설명이 있다. 갑골문은 한자의 기원인데, 은나라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알 수 있다.
그 외 각 나라들의 왕궁과 성의 모습, 주요한 수도 카이펑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중국의 가장 이상 도시 베이징에 대한 설명을 보면 원나라, 명나라에 이어진 많은 정치적 변화, 상업의 발달, 천안문 광장에서의 황제의 의례의식,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단 등에 대한 내용이 있다. 중국은 면적을 보아도 워낙 거대한 나라라서 각 도성마다 역사적 유래도 많다.
“도시의 공기는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는 서양 속담처럼 중국 도시도 서양 중세처럼 자유와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책에서는 여러 자료에 나오는 도시의 모습을 일일이 보여주면서 시각적으로 이해를 돕고 있다. 특히 청명상하도를 보면 도시에는 지금처럼 소비와 향락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장안이란 도시에서 1980년대 우리나라처럼 야간통행금지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전근대적이었다. 도시에는 늘 상인들이 많고 따라서 상업의 발달로 부가 축적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 부분을 보면 우리나라처럼 좌식 방에서 입식으로 발전했으며 화덕에다 땔감, 석탄, 석유 등을 사용했다. 석탄을 캐며 난방을 해결했다는 내용은 과거 우리나라의 거주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등잔 사용의 유래, 목욕탕, 화장실에 대한 내용도 흥미 있었다. 중국인들이 불결하다는 선입견은 올바르지 않은 것 같다.
행- 대운하, 남과 북을 잇다
전 세계가 지구촌이 된 것은 교통과 통신 발달에 힘입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1900년대에 교통 통신이 발달되었다. 교통 통신이 발달이 되어야만 사람들의 공간 이동이 수월해지고 정보를 많이 접하게 되고 비로소 근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중국인은 이를 위해 업적을 많이 쌓았다. 중국을 대표하는 2대 토목공사는 만리장성과 대운하이다. 중국에선 역대부터 임금들이 물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우리의 청계천도 그런 발상이다.
대운하를 건설한 것은 한나라 이후부터 군사적 목적도 있었지만 점차 인구의 증가로 인해 곡물 수요가 급증해서 지역 간의 경제 교류를 위해서이다. 역대 운하의 변천 과정을 보면 운하 건설을 위해 국민들이 많이 동원되고 고생이 많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운하와 강을 많이 보게 된다. 운하는 도시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한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란 말도 자주 듣는다. 지상낙원이라는 쑤저우와 항저우는 원래 토지가 비옥하고 물자가 풍부하고 운하의 개통으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베이징이 정치의 중심 도시라면 쑤저우는 경제 중심 도시이다. 운하와 함께 한 역사의 변천은 다양했다. 명청 시대에 린칭은 운하의 요지로 번성하다가 청말에 황허의 잦은 범람으로 운하가 막히고, 바다를 통해 세량을 운반하는 폐단도 생겼다.
‘도로와 통신’ 부분을 보면 도로의 변천사를 알 수 있다. 도로를 제대로 개발해야 통신산업과 국가 경제가 제대로 발달되고 국가의 흥망성쇠까지 좌우한다. 도로는 단순히 사람이 통행하는 역할 외에도 자연 보호 개발과 함께 모든 편리성을 안겨준다. 도로란 말보다는 인생의 나아갈 방향을 뜻하는 ‘길’이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사람은 길을 통하지 않고선 무슨 일을 할 수가 없다. 중국에선 당시 산적들도 있었기에 힘없는 사람들은 지름길로 가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길에는 지혜가 엿보인다.
삼국지에서 장비가 청두에서 서촉까지 통행의 편리를 위해서 측백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흥미로웠다. 중국은 영토가 넓은 만큼 지형이 다양하고 산세가 험해서 지나가기 어려운 ‘친링’이란 곳이 있어서 험한 절벽에 구멍을 뚫은 ‘잔도’를 만들었다는 것에서도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명나라 시기에는 전시 군사 작전에서 봉화를 사용하였다가 청나라에는 명령을 적은 죽간(竹簡)을 전령에게 비밀리에 전달하게 하는 방법도 사용했었다. 통신의 발달사를 보면 공자 생존 시기부터 전령이라는 사람이 직접 말 타고 편지를 전했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원나라에 이르러서 일정한 간격으로 역참제도라는 통신체계를 설치해서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 건설까지 이어졌다. 우리보다는 앞선 것 같다. 도로를 다니는 통신 수단으론 처음에 수레, 바퀴 달린 독륜차, 소차, 어녀차, 기마, 교차(바퀴 없는 가마), 선박 등이 나왔다. 전국시대에는 유목민들의 말 타는 법을 도입했다.
당나라 현종 때에 최초의 관보인 ‘저보’(邸報)를 발행했고, 명 나라 중기 이후에 베이징과 난징에서 ‘경보(京報)’라는 민간신문을 발행했다. 민간 신문이 나와야 문화가 발달하고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는 법이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국민 여론을 형성하거나 국가 정책을 비판하는 사회의 공기(公器) 역할은 서양의 영향을 받은 후에나 가능했다. 신문이 국민 여론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유언비어가 소문을 타고 흐르는 법인데 당시 중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 때는 민주화가 안 되었던 시대였다.
중국의 길 하면 가장 떠오르는 것은 실크로드이다.(273쪽 설명) 실크로드는 수나라, 당나라 그리고 한나라 때하곤 경로가 다르다.(274쪽 지도) 장건과 반초가 그 길을 개척했다. 실크로그를 통해서 전해진 것은 비단 말고도 향로, 인도에서 온 불교, 중국의 제지술과 화약, 나침반 등이었다. 이곳은 무수한 사신, 여행자, 사신들이 오고갔기에 각 민족의 삶의 터전이었고 중국과 유럽과의 최초 교류를 했던 그야말로 역사발전의 항로인 셈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호’ 자가 붙은 많은 서양 물품(호마, 호과, 호산, 호도 외)이 중국에 들어왔다. 현대에 대규모 기선이 들어서면서 실크로드가 없어졌지만 유목민들의 그 개척 정신은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보면 역사는 집권자보다는 이런 유목민들의 힘이 큰 것이다. 실크로드는 돈황벽화에 남아 있는데 요즘 여행상품의 코스가 되고 있다.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
중국에서 불교는 1~3세기 후한시대에 중앙아시아를 거쳐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왔다. 원나라 대에는 이슬람교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공자의 활동시기도 그랬듯이 당나라 때도 무척 혼란기였다. 삼장법사가 인도에서 불경을 가지고 왔던 때는 당나라였고 그 시대에 불교는 번성했다. 후한시대에 중국에 전파되었다. 그렇지만 중국을 지배하는 사상은 노자의 도가 사상과 공자 맹자의 유교사상이다. 마지막 장에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폴로가 중국에 머물러서 활발하게 문명 교류를 했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다른 책에선 근거가 없다는 말도 나온다.
나는 의식주를 통해본 중국의 역사를 통해서 중국 역사의 무척 다양한 내막과 모습을 알게 되었다. 중국역사는 외세와의 싸움, 국내에서 혼란기, 외국과의 교류 등 실로 파란만장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경로에는 구체적 문화 유산을 통한 것이 있는가 하면 이처럼 인간의 구체적 일상 생활을 말해주는 의식주를 통한 것도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역사는 민족 집단의 기억이며 민족의 전반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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