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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중국의역사

소정방의 당나라 수군과 백제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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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本紀 第五 大宗武烈王신라 본기 제 5 태종무열왕의 본문 해설,삼국사기

3월 唐高宗(당고종)은 좌무위대장군 蘇定方(소정방)을 神丘道行軍大摠管(신구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하고 金仁問(김인문)을 副大摠管帥(부대총관수)에 左驍衛將軍(좌효위장군) 劉伯英(유백영)등은 水陸軍(수육군) 13만명으로 백제를 토벌하는 勅書(칙서)를 내리시니 王(무열왕)은 우夷道行軍摠管(우이도총관)이 되어 장병으로 하여금 聲援(성원) 하였다 여름 5월 26일 왕은 金庾信(김유신), 眞珠(진주), 天存(천존)등을 서울에서 장병을 출동시켜 6월 18일 南川停(남천정:경기도 이천)에 도착하였다. 蘇定方(소정방)은 萊州(래주:산동성 액현)에서 출발하여 船舶(선박:배)을 띄워 천리의 물길을 따라 동쪽(한반도 서해)으로 내려왔다

21일 왕은 태자 法敏(법민)을 파견하여 兵船(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德物島(덕물도:지금 경기만 덕적도)에서 蘇定方(소정방)을 맞이하도록 하니 定方(정방)은 法敏(법민)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 까지 백제의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사와 회합하여 義慈王(의자왕)의 都城(도성)을 파괴하고 죽이고자 합니다


法敏(법민)이 말하기를 대왕은 대장군님을 무척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대장군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듯이 잠자리와 식사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蘇定方(소정방)은 기뻐하면서 法敏(법민)을 還國(환국)시켜 신라의 兵馬(병마)를 징발하게 하니 법민은 돌아와 말씀드리기를 定方(정방)의 군사 세력은 매우 성대하였습니다 하니 왕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金庾信(김유신)과 장군 品日(품일) 欽春(純)(흠순)등과 정예병 5만명을 통솔하여 응원하기로 하고 왕은 突城(돌성:지금의 상주 백화산)으로 행차하셨다

가을 7월 9일 김유신등은 黃山草原(황산초원:지금의 연산황들)으로 進軍(진군)하였더니 백제의 장군 階伯(계백)은 군사를 옹호하며 먼져 와서 웅거하고 三營(삼영)을 설치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한반도(백제본국)을 중심으로 중국.일본.동남아에 이르는 22백제담로

중국영토는 동성왕이 시해당한 이후 친 동성왕계 제후들이 고구려에 복속하여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비문해석"대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하고 새긴 비"-백제본국이 한반도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백제수도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소정방이 새긴 백제 정벌비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백강에서 벌어진 당나라와 싸운 백제부흥전쟁

 

 

 

만주를 당나라에 넘기고 대동강이남에 그친 신라의 반민족적 통일

당나라가 한반도까지 삼키려들자, 백제.고구려유민과 합세한 신라와 당나라 전쟁

[결국 당나라를 끌어들인 신라의 반민족적 통일전쟁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다]

[자료]백제멸망과 관련한 白江과 伎伐浦(기벌포)는 어디인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6년조를 보면 성충이 의자왕에게 올린 상소 내용에 백강과 기벌포가 나오는데, 기벌포는 백제의 수도를 방어하는 아주 중요한 요충지로 적혀 있다. 통설은 기벌포를 금강 하구 즉 지금의 군산 방면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사서 문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다.

성충의 상소 내용을 살펴본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늘 때를 보고 변화를 살폈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할 것이니, 강의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 가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에 의거하여 적을 막은 연후에야 가할 것입니다. 十六年 春三月 王與宮人淫荒耽樂 飮酒不止 佐平成忠或云淨忠極諫 王怒囚之獄中 由是無敢言者 成忠 死 臨終上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常觀時察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必審擇其地 處上流以延敵 然後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沈峴 水軍不使入伎伐浦之岸 擧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焉] 三國史記 百濟本紀 義慈王 16年條

위 문구를 분석해 본다.

가. 강의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 가히 보전할 수 있다.

나. 수군은 기벌포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다.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에 의거하여 적을 막은 연후에야 보전하는 것이 가하다.

라. 육로로는 침현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위 성충의 말에 의하면 기벌포는 어느 강의 상류이고, 강 옆이며,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이며, 수도 사비성을 지키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요충지이다. 그리고 침현은 신라군이 백제 수도로 오는 육로를 막을 수 있는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이다.

백강(혹은 기벌포)에 관한 흥수의 말을 살펴본다.

[당나라 군사는 수가 많고 군대의 기율도 엄하고 분명하며 더구나 신라와 함께 모의하여 앞뒤에서 호응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어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 대하여 진을 친다면 승패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백강(혹은 기벌포라고도 하였다.)과 탄현(혹은 침현이라고도 하였다.)은 우리나라의 요충지여서 1명의 군사와 1자루의 창으로 막아도 1만명이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뽑아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가 백강을 통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은 성을 여러 겹으로 막아 굳게 지키다가 적의 군량이 다 떨어지고 사졸이 피로함을 기다린 연후에 힘을 떨쳐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 唐兵旣衆 師律嚴明 況與新羅共謀 角 若對陣於平原廣野 勝敗未可知也 白江或云伎伐浦炭峴或云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莫當 宜簡勇士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大王重閉固守 待其資粮盡士卒疲 然後奮擊之 破之必矣]三國史記 百濟本紀 義慈王 16年條

위 문구를 분석해 본다.

가.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대진하면 승패를 알 수 없다.

나. 백강은 혹은 기벌포라고도 한다.

다. 당나라 수군이 백강을 통하여 (사비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라. 탄현은 혹은 침현이라고도 한다,

마. 기벌포와 탄현은 백제의 수도를 지키는 요충지이다.

위 흥수의 말에 의하면 성충이 말한 강은 백강이다. 기벌포가 강의 상류에 있다는 성충의 말과 종합하면 기벌포는 백강의 상류에 있었다. 그런데 흥수가 당나라 수군이 백강을 통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당나라 군사가 백강 하구 즉 금강 하구인 군산 방면에 상륙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이 아니고 당 수군이 백강을 거슬러 올라와 수도 사비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뜻이다. 후에 소정방은 성충과 흥수의 예언대로 백강의 기벌포(당서에는 웅진구로 적혀 있다)를 돌파하여 수도 사비성으로 향하였다.

문무왕 본기 16년조에는 기벌포가 소부리주에 있다고 적혀 있고, 삼국사기 잡지에 의하면 소부리주는 부여군이다.

[문무왕 16년(A.D 676년) 겨울 11월 사찬 시득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우다가 크게 패하였다. 冬十一月 沙飡施得領船兵 與薛仁貴戰於所夫里州伎伐浦 敗績]

[문무왕 11년(A.D 671년) 소부리주를 설치하였다.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하였다. 置所夫里州 以阿飡眞王爲都督]

[부여군은 본래 백제 소부리군이다. 扶餘郡 本百濟所夫里郡] 三國史記 卷第36 (雜志 第5) 地理/新羅/熊州/夫餘郡

위 문구에 의하면 기벌포는 부여군에 있었다. 금강하구가 아니다.

기벌포 싸움 직전 백제군의 대처상황을 살펴본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 서쪽의 덕물도에 이르렀다. 신라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는 것이 좋을지 지키는 것이 좋을지를 물었다. 좌평 의직이 나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지 못한 자는 배에서 반드시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처음 육지에 내려서 군사들의 기운이 안정치 못할 때에 급히 치면 可히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은 당나라의 후원을 믿는 까닭에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인데 만일 당나라 군사가 불리하게 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기세 좋게 진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압니다.” 달솔 상영 등이 말하였다.“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와서 속히 싸우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 예봉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라 사람은 이전에 여러 번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하였으므로 지금 우리 군사의 위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군대의 길을 막아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은 후에 형편을 엿보아 세력을 합하여 싸우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王은 주저하여 어느 말을 따를지 알지 못하였다. 이 때에 좌평 흥수는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에 유배되어 있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묻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다. 흥수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수가 많고 군대의 기율도 엄하고 분명하며 더구나 신라와 함께 모의하여 앞뒤에서 호응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대진하면 승패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백강혹은 기벌포라고도 하였다.과 탄현혹은 침현이라고도 하였다.은 우리나라의 요충지여서 1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으로 막아도 1만명이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뽑아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가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은 여러 겹으로 막아 굳게 지키다가 적의 군량이 다 떨어지고 사졸이 피로함을 기다린 연후에 힘을 떨쳐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 이 때에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잡혀 갇힌 몸으로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가히 쓸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게 하여 물의 흐름을 따라 배를 나란히 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을 올라오게 하여 좁은 길을 따라 말을 가지런히 할 수 없게 함과 같지 못합니다 이 때에 군사를 놓아 공격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왕이 그럴 듯이 여겼다.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장군 계백을 보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에 나아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네 번 크게 어울려 싸워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도 꺾이어 드디어 패하고 계백도 죽었다. 이에 군사를 합하여 웅진강 입구를 막고 강변에 군사를 둔치게 하였다. 소정방이 왼편 물가로 나와 산으로 올라가서 진을 치자 그들과 더불어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당나라 군사를 실은 배들은 조수를 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고 떠들어댔다. 정방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그 도성으로 나아가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우리 군사는 모든 병력을 다 모아 이를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다.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王聞之 會 臣 問戰守之宜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者在船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 羅人恃大國之援 故有輕我之心 若見唐人失利 則必疑懼 而不敢銳進 故知先與唐人決戰可也” 達率常永等曰 “不然 唐兵遠來 意欲速戰 其鋒不可當也 羅人前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宜塞唐人之路 以待其師老 先使偏師擊羅軍 折其銳氣 然後伺其便而合戰 則可得以全軍而保國矣” 王猶豫 不知所從 時佐平興首得罪 流竄古馬彌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之何而可乎” 興首曰 “唐兵旣衆 師律嚴明 況與新羅共謀 角 若對陣於平原廣野 勝敗未可知也 白江或云伎伐浦炭峴或云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莫當 宜簡勇士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大王重閉固守 待其資粮盡士卒疲 然後奮擊之 破之必矣” 於時 大臣等不信曰 “興首久在 之中 怨君而不愛國 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幷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譬如殺在籠之 離網之魚也” 王然之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 伯 帥死士五千 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竟敗 伯死之 於是合兵禦熊津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而陣 與之戰 我軍大敗 王師乘潮 銜尾進 鼓而 定方將步騎 直 其都城 一舍止 我軍悉衆拒之 又敗死者萬餘人] 三國史記 百濟本紀 義慈王 20年條

위 문구를 분석해 본다.

가. 당나라 군사는 백강의 기벌포를 지나 웅진강구에 상륙 하여 백제군사를 물리치고 사비성 30리 되는 곳에 머물었다.

나. 웅진강구는 금강에서 기벌포보다 상류에 있다.

다. 백제 조정이 갑론을박하고 있는 사이에 당군은 백강 하구를 지나 백강을 거슬러 기벌포로 향하였다. 따라서 기벌포는 백강 하구를 지나 백강을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 있다.

위 문구에 의하면 당군은 백강 하구를 지나 백강을 거슬러 기벌포로 향하고, 신라군은 천험의 요지인 탄현을 이미 넘어 황산벌로 향하자 그제서야 당황한 백제 조정은 백제군을 나누어 일부는 기벌포로 보내어 백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당군에 대비하고, 일부는 황산벌로 보내어 신라군과 대진하였다. 그러나 계백 장군이 거느린 백제군은 황산벌에서 신라군에 패하였다. 백제는 황산벌의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웅진강구로 보내 당군에 대항하였으나, 소정방은 백제군을 물리치고 곧장 사비성으로 나아가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백강은 금강이다. 금강은 위치에 따라 상류는 웅진강 그 아래는 백강으로 불리웠다. 그리고 기벌포는 당군이 이미 백강 어귀를 통과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는 지점이다. 따라서 기벌포는 금강하구보다 훨씬 상류에 있었다.

당서에는 기벌포가 웅진구로 적혀 있는데, 이로 보아 기벌포나 웅진구나 모두 금강(백강) 어느 곳에 있는 지점이고, 기벌포와 웅진구는 동일지점이거나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그곳을 지나면 사비성까지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率師討百濟 定方自城山 濟海 至熊津江口 賊屯兵據江 定方升東岸 乘山而陣 與之大戰 揚帆蓋海 相續而至 賊師敗績 死者數千人] 舊唐書 蘇定方傳

[自城山濟海 百濟守熊津口 定方縱擊 虜大敗 王師乘 潮帆以進] 唐書 百濟傳

어떤이는 위에 나오는 "당나라 군사를 실은 배들은 조수를 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고 떠들어댔다." 문구를 보고 웅진구를 금강하구 방면으로 보나, 이 문구는 당군을 실은 배가 조수를 타고 금강하구를 거슬러 올라오며 북을 치고 떠들었다는 상황을 적은 것이다. 그리고 웅진구는 백강을 상당히 거슬러 올라와 수도 사비성과 가까운 곳이다.

기벌포 위치에 대한 결론

위에 나온 문구로 보아 백강은 지금의 금강이다. 그리고 기벌포는 백강의 어느 지점인데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이 있는 곳이 아니며, 험난하고 강폭이 좁은 곳이며, 부여 보다는 아래에 있다. 또 조수의 영향을 받는 곳이므로, 금강하구에서 그렇게 멀리 올라간 지점이 아니다. 여러 문구를 종합하면 기벌포는 강 옆에서 보기병이 배를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곳이다. 강 옆에서 군사가 수로를 지킬려면 성이나 그만한 방어시설이 있어야 한다. 이에 적합한 지점은 가림성과 가까운 부여군 양화면 방면으로 추측한다. 이곳은 금강을 감시할 수 있고 금강 대안에 설치된 가장 중요한 방어성인 가림성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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