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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중국의역사

비운의 황제, 송나라 휘종과 흠종 부자,금나라 청나라, 과연 한국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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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년 중원에 일대 격변이 일어났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송나라를 강남까지 밀어내고, 당시 송을 다스리던 흠종과 그의 아비인 휘종을 포로로 잡아간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흠종의 연호가 정강이라 이 사건을 정강의변(靖康之變)이라 부른다.

 

송나라는 당나라 말기 절도사의 난립을 보고 무를 억제하고 문을 숭상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송의 국방력은 취약해져 거란과 서하의 침략에 시달렸다. 결국 송은 거란과 서하에 은, 비단, 차를 비롯한 막대한 세폐를 바침으로써 그들의 침략을 방지하였다. 이로 인해 송의 재정은 나날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그 타개책으로 왕안석의 개혁을 통해 수많은 개혁정치를 실행하였지만, 보수파 관료들의 반발에 부딪혀 투쟁이 격화되고, 피폐한 농민들에 의해 방랍의 난 같은 농민의 반란이 잇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8대 황제 휘종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일에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는 채경, 동관과 같은 간신배에게 맡기고 자기 자신은 서화나 골동품에 심취하거나 미녀의 품에 안기는 등 '풍류천자'의 생활을 하였다. 황제가 정치에 손을 떼자 간신배들이 득세하여 백성들을 마구 착취하였다. 이로 인해 송의 국력은 탕진되었고, 정치와 경제 재정상태는 빈사 직전이 되었다.

 

이 때 동북 만주에서는 대영웅이 출현했다. 여진족을 통합한 아골타는 1115년 독립을 선언하며 금을 건국, 요나라에 대해 공세를 취했다. 이에 송 조정은 해상에서 금에게 요에 바치던 세폐 전액을 바칠테니 함께 협공하여 과거 중원의 영토였던 연운 16주는 송이 차지하기로 금과 맹약을 맺고 거란의 요를 협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송은 취약한 군사력으로 인해 금과의 맹약을 이행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금이 요를 공격하여 연운 16주를 차지했다.

 

그러자 송은 금이 연운16주를 차지한데 분개하여 거란과 협력하여 금을 치고자 했으나, 요나라 황제 천조제가 사로잡힘으로써 송과 거란의 맹약이 드러났다. 이에 분개한 금은 송의 수도 개봉을공격하였다. 황제였던 휘종은 금의 공세에 놀라 재빨리 아들에게 양위를 하였다. 이가 바로 흠종이다.

 

흠종은 수도를 포위한 금군과 협상을 벌여 영토의 할양과 배상금 지불 등을 논의하는 굴욕적인 내용의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한세충을 비롯한 주전파는 그 강화에 반발하였고, 끝내 강화맺은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인해 금나라는 다시 총공격이 시작된다. 40일간을 치열한 공방전 끝에 1126년 11월 수도 카이펑이 함락되고 만다. 그 해가 정강 원년이었다.

금나라는 황제였던 흠종과 그의 아비 휘종, 그리고 수많은 왕족과 관료 수천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서진 황제 회제와 민제가 흉노족이 세운 한의 유총, 유요에 포로로 잡힌 이후 두 번째로 중국의 황제가 이민족에게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금나라는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했다며,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로 흠종에게 혼덕공(昏德公), 휘종에게는 중혼후(重昏候)이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한편 휘종의 9번째 아들 조구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강남 임안에 남송을 건국하여 송은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포로로 끌려간 송 황제 휘종과 흠종 부자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 세계사를 배울 때 우리는 금나라의 공격으로 휘종, 흠종 부자가 포로로 끌려갔다고 배웠지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배우지 못했다.

 

지금부터 나는 그들의 비참한 포로생활을 쓰고자 한다.

 

포로로 끌려간 송 휘종과 흠종, 그리고 휘종의 정 황후와 흠종의 주 황후 이 네 사람의 호송을 담당한 이는 금나라 장군 택리(澤利)였다. 신안현에 도착한 택리는 그곳의 현령과 함께 큰 연회를 열어 승리자의 모습으로 기뻐하며 많은 술과 음식을 먹었다. 술에 취한 그는 잔뜩 흥이 올라, 주 황후에게 술자리에 와서 노래를 부르고 흥을 돋우라 명령했다.

 

주 황후는 눈물을 머금고 야윈몸을 이끌며 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幼富貴兮厭羅綺裳 어린 시절 부귀하여 비단 치마 싫증나네

長入宮兮奉尊觴 자라 입궁하여 귀한 술잔을 받았네

今委頓兮流落異鄕이제 나이 들어 타향을 해매니

讚造物兮速死爲强 아! 조물주여 빨리 죽여 강하게 하소서

 

구슬프고 처절한 노래였다. 하지만 노래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던 택리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그녀의 노래에 만족했다. 그는 술자리 흥을 돋우기 위해 주 황후에게 노래 한 곡조를 더 부르게 하고 현령에게 술을 따르라 했다.

 

昔居天上兮柱宮玉闕 과거 천상에서 보석으로 된 궁궐에 살았는데

今日草莽兮事何可說 이제는 풀숲에 있으니 이를 어찌 다 말로 할까

屈身辱志兮恨何可雪 몸을 굽혀 치욕을 당하니 이 한을 어찌 다 풀까

誓速貴泉下兮此愁可絶 어서 저 세상으로 가면 이 근심 끝낼 수 있을텐데

 

두 황제와 두 황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이 때 술에 취한 택리는 주황후에게 손짓으로 자신의 곁에 앉혀 술시중을 들라했다. 주 황후가 미동하지 않자 택리는 비틀거리며 주황후 곁으로 가 억지로 그녀를 잡아 끌었다. 그녀는 술시중을 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에 대노한 택리는 그녀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닥치는 대로 때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흠종이 화가 나 호통치며 그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그러자 택리는 칼을 꺼내 흠종을 죽이려 했다. 신안현의 현령이 급히 말리며 "이들을 생포해 오라는 명령이셨습니다. 지금 그들을 죽인다면 아마 장군께 불리할 것입니다"

고 말하자, 그제서야 택리는 칼을 놓았다.

 

10여일 만에 일행은 잔뜩 먼지를 덮어쓴 채 금의 수도 연경에 도착했다. 두 황제와 두 황후는 민충사에 기거하다 며칠 후 서인의 신분으로 아골타의 동생이자 금 태종 오걸매(吳乞買)를 접견했다. 오걸매는 그들의 사형을 면해주고 영주로 보낸다고 말했다, 그 전에 4사람은 흙으로 만든 작은 방에 갇혀 매일 썩은 고기 몇 점이 올려져 있는 보리밥 두 그릇으로 생을 연명하며 지냈다.

 

주 황후는 상심한데가 치욕까지 받으며, 추위와 배고픔에 고통받다가 몸져 누웠다. 흠종은 슬피 울며 의사의 진찰을 간청했지만, 문 밖의 병사는 큰 소리로 꾸짖을 뿐 가련한 흠종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3일 후 주 황후는 차디찬 흙방에서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병사들은 그녀를 멍석으로 말아 대충 매장했다.

 

나머지 세 사람이 영주에 도착했다. 주령은 그들은 흙방에 가두고 번관(番官)과 정역(丁役)을 보내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번관은 흉기를 검사한다는 구실로 정 황후의 몸을 뒤지면서 그녀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었다. 정 황후는 휘종을 모셔야 했기에 울분을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영주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농사를 지은 탓에 피부가 까맣게 변하고 몰골이 초취했다. 만약 과거 신하들이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들이 과거 황제, 황후였다는 것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일년 뒤 그들은 내주로 보내졌다. 하지만 남쪽에서 송군이 금군을 대패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들은 다시 오국성으로 옮겼다.

 

오국성에서 정 황후가 생을 마감했고, 3년 뒤 휘종은 실명하게 된다. 휘종은 더 이상 고국산천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울분을 토했다. 그는 낮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밤에는 웅크리고 엎드려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렇게 휘종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이국 타향에서 5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휘종이 죽었지만, 흠종은 고국으로 돌아갈 희망을 안고 꿋꿋하게 살아갔다. 그는 21년동안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견뎠다. 남송 소흥 26년 금나라 황제 완안량(完顔亮)이 병사를 이끌고 송나라 정벌 준비에 나섰다. 병마를 검열하던 그는 흠종을 과녁 삼아 그를 향해 화살을 난사했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진흙탕에 놓고 말들에게 짓밟게 했다. 흠종의 나이 56세였다.

 

 

 

 

 

비운의 임금 송 황제 휘종(왼쪽)과 흠종(오른쪽)

 

 

 

 

 

금나라 청나라, 왜 한국사인가,

1. 총설

서기1125년 북방의 여진족을 통일한 아골타가 이끄는 금나라 군대는 일명 몽골준마(과하마)로 편성된 기마군단을 앞세워 요나라로 진군한다. 이어 고려를 3차례나 침공한 북방의 강대국 거란의 요나라를 순식간에 집어 삼킨다. 이어 한 대륙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차이나족의 송나라 정벌에 나섰고 이 소식을 접한 송나라 조정은 공포로 공황상태가 되어 화친 제의를 하였지만 파죽지세로 휘몰아쳐 오는 금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금군은 송나라를 초토화 시키고 한대륙 서남부 구석으로 쫓아 버린다(서기1127년). 이 과정에서 송나라 왕 부자 희종, 흠종을 생포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이 때 금군은 고구려 조의선인皁衣仙人들의 상징인 검은 옷을 입고 진군하였는데 공자교를 개량 발전시킨 주자학朱子學의 교주 ‘주자朱子’는 이 검은 옷을 입고 진군하는 금군이 자신의 황제를 생포하는 것을 목도하였고 이 후 검은 색만 보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치를 떨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부터‘까마귀’를 증오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전통은 차이나족을 어버이로 모시고‘소중화’, 작은 중국을 자청한 이성계의 조선정권이 받들어 우리나라에도 오늘날 까지‘까마귀’라고 불리며 흉조凶鳥로 인식되고 있다.

12세기 초반 동아시아의 3국 강역도. ‘대륙에서8600년 반도에서600년’451쪽/이병화.한국방송출판 2002. 이 책을 기본으로 하여 고려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기록했다는 ‘북관유적도’와 삼국사기/잡지雜志/지리地理4 편의 ‘서경을 평양이라고 하고 평양을 장안(현재 한대륙 섬서성 서안의 옛이름)’이라는 부분과 기타 명나라 때 변조된 고려의 흔적이 남은 지명을 참고로 하여 그린 것이다. 아울러 서경을 호경이라고도 한다. 고지도를 보면 섬서성 현재의 장안을 호경이라고도 표시하고 있다. 또한 사천성에는 려강麗江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이는 ‘고려강’이 본래 지명이었다고 본다.

금군에게 생포되어 포로로 잡혀가는 송나라 왕 희종과 흠종부자 상상도( 이 사진과 이하 사진들은 한국방송의 역사특집 ‘만주대탐사’ 2부작 중,‘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에서 발췌한 것이다.)

한편 금나라가 차이나족 송나라를 초토화 시킨 지 약 5백년이 지난 서기1619년 요동의 ‘싸얼후’지역에서 다시 금나라의 후예 ‘후금’의 금누르하치가 이끄는 정예기마군단 팔기군 2만과 차이나족 명나라 군대 27만이 맞붙는다. 결과는 명나라 군대27만의 괴멸이었다.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27만 명나라군대를 휩쓸어 버린 비결은 다음과 같은 금누르하치의 평소 자신감에서 나왔다고 한다. “팔기군 기병 1만이면 세계를 제압할 수 있다.”

금누르하치는 이 전투에서 승리를 한 후 본격적으로 차이나족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한 대륙 고토수복에 나선다. 금누르하치를 이어 대칸(Great Khan)이 된 청태종 금홍타이지가 결국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오랜 숙원사업인 고토수복의 위업을 달성한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를 어버이로 모시며, 오랑캐 명나라를 공격하는 청군을 배후에서 치려던 새끼중국인 정권, 이씨조선정권은 청태종이 이끄는 팔기군에게 괴멸되고 결국 ’삼전도의 예‘를 갖추고 항복하고 만다.

오늘날 차이나족(중공)이 차지하고 있는 땅은 만주 청나라가 넓혀 놓은 땅이다. 차이나족은 20세기 초부터 ‘멸청흥한'을 외치며 단결하여 손문이 괴수가 되어 결국 서기 1910년에 ‘신해반란(이른바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다. 그리고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손문의 뒤를 이은 장개석의 국민당정권을 한 대륙에서 대만으로 몰아내고 한대륙을 다 차지하여 중공정권을 수립한다. 오늘의 차이나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그런데 이러한 금나라와 청나라를 현재 우리 국사책은 북방 오랑캐 여진족이 세운 나라로 취급하고 우리의 역사가 아닌 한대륙(소위 중원대륙)을 정복한 ‘정복왕조’로 묘사하여 차이나족의 역사로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금제국과 청제국은 차이나족의 역사인가,

2. 금나라 시조는 신라(고려)인의 후손

차이나측 사료와 한국의 사료를 보면 곳곳에 금나라를 세운 태조 아골타와 그 시조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1) 금사 본기 제일 세기의 기록

금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였다. 원래 그는 고려에서 왔다. 그가 고려를 떠날 때 60대였다. 그의 형 아고는 불교를 숭상했는데 그와 함께 고려를 떠나기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후손들이 다시 돌아와서 만날 곳이 필요하다. 나는 갈 수 없다.” 그래서, 동생인 보할리하고만 왔다. 그는 완안부의 복간수 근처로 갔다. 동생 보할리는 야뢰로 갔다. 그 후, 호십문이라는 부족이 갈소관이라는 곳을 태조께 바쳤는데 말하기를 그들은 시조와 같은 삼형제의 후손이며 그들은 아고의 후손이고 석토문과 적고내는 보활리의 자손들이라는 것이다. 후에 태조가 요의 군대를 국경에서 격퇴했는데. 요의 장군 야율사십을 사로잡고 태조는 두 명의 사절, 양복, 알답자를 보내 발해 사람들에게 항복을 요구하면서 “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 가족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원래 다 같이 물길의 7부족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금나라 시조 함보가 그곳에 거주한지 오래다. 그 부족사람이 다른 부족사람을 살해하여 양쪽 부족이 악화되었고 서로 해결할 수 가 없었다. 완옌부 사람이 시조에게 말하기를 ‘만일 완옌부 사람을 위하여 이 원망을 풀어 두 부족으로 하여금 서로 죽이는 일이 없게 해 준다면 완옌부에는 시집을 안간 60세의 착한 처녀가 있으니 마땅히 배필로 삼아 완옌부의 사람이 되게 할 것이오’ 하니 시조는 것을 허락하고 스스로 나아가 타이르기를 ‘한 사람을 죽인 것 때문에 싸움이 끝나지 않고 다치는 사람이 더욱 많으니 난의 괴수 하나만 베어 죽이는 것으로 끝내면 부족 내에서 물건으로 보상할 것이다. 너희는 싸우지 아니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니 저편에서 이 말을 따랐다. ...중략... ‘뒤에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 우루요, 다음이 위루였다. 또 주세판이라는 딸을 낳았는데 완옌부의 사람이 되었다.

2)송막기문의 기록

여진 추장은 신라인이며 완안씨다. 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女眞之主乃新羅人號完顔氏.

3) 삼조북맹회편의 기록

“여진의 시조 건푸는 신라로부터 달아나 아촉호에 이르렀다. 돌아갈데가 없어 완옌부에 의지하여 완옌을 성씨로 삼았는데 나이60여세에 아직 처가 없었다. 그 때에 이들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며 제도와 법도가 없었다. 건푸는 나무를 깎아 약속하는 의미를 세워 사람들에게 빚을 놓아 이자를 생기게 하고 농사를 부지런히 짓게 하였으며 가축을 도둑질 한 자에게는 형벌과 배상의 법을 마련하였다. (중략)이웃의 추장이 딸이 있었는데 나이 40여에 아직 미혼이었다. 소와 말, 예물을 가지고 건푸에게 시집을 갔다. 뒤에 여진의 여러 추장이 동맹을 맺고 그를 추대하여 수령으로 삼았다.”

4)청나라 건륭제의 칙명으로 편찬된 ‘만주원류고’의 기록

“(아골타가 세운 나라를)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

“전해오는 역사책에 의하면 신라왕은 성이 김씨로 수십세를 이었다. 금의 선조가 신라에서 온 것은 의심할 바 못되며 건국할 때 나라 이름은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금의 시조 합부哈富는 처음 고려에서 완안부로 거주하니 마침내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안출호에 거주하였으니 금을 안출호라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는 청나라 건륭제의 7대 손이라고 하는 김괄씨가 청나라 만주족 황실의 성씨로 알려진 한자식 이름인‘애신각라愛新覺羅’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만주실록에 나오는 ‘애신각라’에 대한 설명이다. 위 김괄씨가 풀이한 것과 대체로 들어맞는다. 청나라 역대황제의 이름 앞에는 모두 이 ‘애신각라’가 붙어있다. 예를 들어 청태종의 경우 ‘애신각라’홍타이지인데 풀이하면 ‘금을 성씨로 하는 홍타이지’가 된다. 즉 금(김)홍타이지이다.

만주실록에 전해오는 3선녀 설화이다. 만주실록에는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 과 같은 ‘3선녀’ 설화가 전해온다. 왼쪽상단에는 버드나무가 그려져 있다. 버드나무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청나라 황실은 이 버드나무를 신성시하였고 차이나족이 동북방 한주(만주)지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유조변’즉 버드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였다. 이는 버드나무가 북방 한겨레에게는 부적과 같은 주술적인 상징성을 갖고 있어 한주(만주)는 청황실이 기원한 신성한 곳이니 더러운 오랑캐 차이나족은 출입을 금지 한다는 뜻이다.

5)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의 기록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 아골타가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금이라 불렀다. 그곳 풍속은 흉노와 같아서 여러 부락은 성곽도 없이 산과 들에 나누어 살았으며, 문자가 없어 언어와 결승(結繩)으로 약속하였다. 땅은 비옥하여 돼지 양 소 말이 많았는데 준마는 어떤 때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러웠고 아이들도 능히 활을 잡아당겨 새나 쥐를 쏘아 맞혔다. 커서는 모두 활 쏘고 말을 타고 싸움터에 나가 싸우는 노련한 병사(勁兵)가 되었다. 그러나 각 부락이 서로 자웅을 다투어 통일되지 못했다. 혹은 말하기를 " 옛날 우리나라(신라 내지 고려) 평주의 승려 금준이 여진으로 도피해 아지고촌에 거주했는데 그가 금나라의 시조다"라고 하고 또 혹은 말하기를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극수가 처음 여진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니 고을태사이고 그 아들이 활라태사다"고 한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6)금 태조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보낸 국서의 기록

“형인 대여진금국황제는 아우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섬기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

7)납북 사학자 손진태의 ‘금태조는 황해도인야’라는 논문의 기록

금태조 아골타가 스스로 고려는 ‘부모 지방’이라 했고, 중국측 기록 ‘금지’에는 금나라 왕은 본시 신라인이요 호가 완안인데 완안은 한어로 왕이란 뜻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금태조가 신라인이라는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전한 이야기여서 ‘고려사’에 기사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와서 실학자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에서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강화도 커발한 개천각에 모셔져 있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한단고기를 저술한 이유립 선생이 모시던 사당이다.

8)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의 신단민사의 기록

김교헌은 자세하게 신라 왕손이 여진 땅에 가서 먼저 완안부의 지도자가 되고 어떻게 해서 금나라를 세우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한국사 개설서인 ‘신단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9)박은식 전서 ‘몽배금태조전’의 기록

“이에 무치생이 두렵고 송구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흐르는 땀이 등을 적시는지라 다시 말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는데, 황제가 특별히 온화한 가르침을 내리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조선의 유민(遺民)이 아닌가. 조선은 짐(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부모의 나라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다. 짐은 지금 천국에 있는 고로 인간 세상의 일은 직접 간섭하지 않지만 하늘에서 오르 내리는 영명(靈明)이 인간 세상을 감찰하고 있으니 현재 조선민족이 떨어진 경우와 고통스런 정황을 보는 것이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스스로 싸워 강한 자를 사랑하시고 자포자기한 자를 싫어하시니, 하늘의 뜻이로구나. 너희 조선 민족이 종시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고 스스로 강해지는 방도를 구하지 않으니 현상도 극히 참혹하거니와 다가올 비운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구한말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의 모습-그의 열정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 꿈에서 금나라 태조가 나타나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조선과 한 핏줄임을 알리고 바른 역사관을 설하였다고 한다.

9)아골타의 조상이 되는 신라인 김행 金幸 또는 김준金俊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 김부金傅를 시조로 하는 부안김씨의 족보에는 김행이 마의태자 아들로 되어 있으며 형제 둘을 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김행은 두 형제를 고려에 두고 홀로 만주로 떠났다고 한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김준金俊이 여진으로 갔다고 한다.

이와 같이 금나라 시조가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사료는 상당하다. 위 사료를 요약하면 이름만 다를 뿐이지 신라 또는 고려인인 신라 금씨를 가진 사람이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가서 여진사람과 일가를 이루었고 여기에서 나온 자손이 아골타이고 이 사람이 금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만주의 어느 만주족 마을에서 벌어진 굿판이다. 이를 보면 우리의 가면놀이와 닮아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무당사제가 있다. 우리의 풍물 굿과 같은 것이다. 가면이 곰과 호랑이어서 우리의 ‘단군설화’를 연상시킨다. 이 들은 지금도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고구려식 구들장 난방장치를 하고 산다. 청태종이 명나라 정벌을 하면서 구들장(온돌)으로 따듯하게 하여 겨울 혹한의 추위를 견뎌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3. 금나라의 지배세력은 발해인

금나라 개국과정을 보면 발해인의 활약상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표, 곽약사, 대호, 장호 등인데 이들은 발해 유민들로서 금나라 개국의 일등공신이며 금나라의 치안을 담당하는데 크게 활약한 인물이라고 한다. 더구나 금나라 황제들이 발해계였다는 사실이다. 금나라 3대 희종황제는 폭정을 심하게 하였는데 해릉왕이 희종을 죽이고 금나라 4대 황제가 된다. 해릉왕은 금태조의 서얼 장자인 요왕 종간의 아들이고 모친은 대씨성을 가진 발해의 여인이라고 한다. 해릉왕은 이후 발해 출신인물을 대대적으로 기용하여 자신의 황권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그는 한 대륙을 완전히 수복하고자 한 대륙 서남으로 도주한 남송南宋 을 정벌하였는데 이것이 무리한 원정이 되어 결국 금 태조 아골타의 아들인 예종과 이씨성을 가진 발해 여인과의 사이에서 난 세종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금나라 세종은 금나라 치세 중 가장 뛰어난 황제로 칭송을 받았는데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세종의 외가가 발해계였다는 사실이다.

발해인 장호는 금나라가 차이나족 송나라를 초토화 시키고 현재의 북경에 서울을 정하면서 오늘날의 자금성과 같은 대규모 금나라 황실 궁궐을 짓는데 총 책임자였다고 한다. 이는 대제국 발해의 유민으로서 대제국을 경영해 본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 각저총에 나오는 씨름과 같은 씨름을 하고 있는 금제국, 청제국의 후예 만주족 젊은이들

혜릉왕과 세종대에 활약한 발해관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해릉왕 때 활약한 관료는 도단태후 살해를 맡은 점검 대회충, 어사대부로서 해릉왕의 신변경호를 맡은 고정, 왕안형을 살해한 유충, 희종살해를 계획한 고희정이다. 다음으로 세종의 치세에 활약한 발해관료는 해릉왕에 의해 제명당했으나 세종 때 다시 발탁된 비서승 대영, 세종의 외척으로 정책공인 이석, 원로대신으로 장호, 절도사로서 장현소, 장여필, 고간, 고덕기, 고희정이다.

결국 금나라를 세운 세력도 고려인(신라인)의 후예들이고 그 지배세력도 발해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금나라는 발해 왕비족과 신라 후예의 연합정권이었고 이는 차이나족보다는 한국의 역사에 훨씬 더 가깝다.

5. 금나라 태조의 선조, 금준의 고향 땅 평주와 고려의 강역

‘고려사 세가’와 박은식 선생의 ‘몽배금태조전’ 에는 금나라 태조의 선조 금준이 평주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면 평주는 현재 어디인가, 국내에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온다. 황해도 평산 平山이 평주라는 견해, 함경도 영흥이라는 견해이다. 그런데 차이나족 자료‘중국고금지명사전’ 209쪽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고 한다. ‘평주平州는 진나라가 유주를 나누어 다스린 곳인데 지금의 요령성 열하, 조선朝鮮의 땅이다(晉分幽州治今遼寧熱河朝鮮之地).’ 또한 차이나족 고지도를 보면 하북성에 ‘평’ 지명이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금나라태조 아구타(아골타)의 선조 금행金幸(또는 금준)이 고려인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면 그의 고향이 현재 한주(만주) 요령성 열하 또는 하북성 어느 지역이라고 하고 있으니 고려의 강역이 하북성 또는 요령성 열하에 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의 영토 공험진이 현재 북만주지역에 표시되는 것과 함께 계산해 보면 고려의 영토는 현재 국사책이 그리는 것과 같이 북한 신의주와 원산만을 잇는 이하 지역이 아니라 한주를 포함하여 북경까지 넘본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윤관장군의 고려군 17만명이 북만주 ‘공험진’으로 여진족 토벌에 나서고 있다. 당시 고려는 거란의 요나라와 오랜 전쟁을 끝내고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요나라의 국경에는 언제 또 전쟁이 벌어질지 몰라 상비군을 배치 시켜놓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북만주의 여진족 토벌을 위해 별도로 17만 정예 병력을 편성한 것이다. 이는 고려의 국력이 얼마 컷는지 짐작할 수 있는 사례다. 이조시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상비군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아 의병으로 개전초기 버티고 나중에는 명나라군대를 끌어들여 겨우 막는 신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는 실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대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고려가 유사시 즉각 동원할 병력이 40만이 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만한 병력을 보유하려면 얼마의 인구와 영토가 있어야 하는지 계산해 볼 때 ‘대륙고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려군이 여진족을 토벌하고 9성을 쌓은 후 여진과 고려의 경계를 정하는 비석을 세우고 있다. 좌측그림에 흰 비석을 세우는 그림이 보인다.

고려는 서기1107.12.에 윤관장군의 고려군 17만명으로 북만주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함경북도 종성에서 북쪽으로 700백리 떨어진 공험진이라는 곳에 9개성을 쌓고 돌아온다. 나중에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형, 오야속이 ‘자신들은 고려가 부모나라고 우리는 거기서 왔으니 9성을 돌려주면 부모나라로 섬기고 고려 쪽을 향해 기왓장 한 장도 던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몇몇 문헌 조사만으로도 고려는 대륙을 차지하고 있던 대제국이었음을 가늠 할 수 있다. 특히 백제와 같이 완전히 개방된 바다를 지배한 해양제국이었다. 당대 세계최고의 조선술을 바탕으로 세계최고의 선박을 건조하여 바다를 지배한 대제국 고려였다. 그렇기에 고려의 전함이 세계최초로 함포를 장착하여 해전에 사용할 수 있었고 강력한 태풍에도 견뎌 낼 수 있었던 것이다.

6. 동북공정을 위해 자신들의 위대한 영웅도 버리는 폐륜정권 차이나 중국 공산당

중국 공산당 정권은 자신들이 현재 차지하고 있는 한 대륙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기치 하에 수많은 이질적인 민족들이 수천년에 걸쳐 세운 왕조와 역사를 차이나족을 중심으로 하나의 ‘중국역사’로 재편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을 저지하고 ‘중화제일주의’ 패권을 이어가려고 한다. 이는 국가중점사업으로 강력히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기조하에 한대륙 각 방향별로 각종‘ 공정’을 저지르고 있는데 동북방에서의 공정은 ‘동북공정’이라고 한다. 이미 완료한 다른 지역의 공정 즉, ‘서남공정’ 과‘ 서북공정’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공정은 엄연히 독립 국가를 이루고 살던 민족들을 차이나족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편입하여 궁극적으로 차이나의 2등 민족으로 흡수해 버리겠다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핵심은 아래와 같다. 동북방의 역사 즉 우리 한반도를 포함 한주와 몽골지역의 모든 역사는 차이나족 중국의 역사인데 현재 이 지역을 독립한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는 불법이며 반드시 빼앗아 와야 하는 중국 땅이다. 따라서 잃어버린 땅을 수복한 후 이 땅에 살고 있는 민족들은 당연히 차이나족의 구성원인 소수민족이고 이 지역은 차이나의 일개 성으로 편입되어야 한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우리 반도한겨레를 포함 몽골한겨레의 뿌리를 뽑아 멸망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동북공정의 이론적 토대인 ‘역사공정’에서 이들의 음모는 파탄이 나고 있다. 이미 금나라와 청나라의 역사가 우리 한국사임이 드러났음에도 저들은 여전히 궤변을 늘어놓으며 자기네 역사라고 한다. 이외에 대표적인 사례는 금나라 군대에 맞서 송나라를 연명시킨 송나라 장군 ‘악비’에 대한 중국 공산당 정권의 무자비한 공격이 그것이다. 악비장군은 사력을 다해 금군으로부터 송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웠다. 그래서 차이나족은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해 왔다. 그리고 악비장군을 살해한 두 사람을 나체석상으로 무릎 꿇게 만들어 놓고 침을 뱉고 비난을 하고 있다.

‘역사공정’을 시작하면서 이들은 큰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북방의 금나라 역사를 차이나족의 역사로 편입시킨다면 금나라와 싸운 악비장군은 더 이상 영웅의 반열에 있으면 안 된다. 자기 동족에게 대항한 인물로 격하시켜야 한다. 만약에 악비를 계속 위대한 영웅의 반열에 두면 금나라는 더 이상 차이나족의 역사가 될 수 없다. 금나라는 차이나족에게는 적이 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공정권은 국내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악비’ 장군을 더 이상 민족영웅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7. 결론

차이나족의 문헌과 금사 그리고 고려사 등의 수많은 사료에서는 분명히 금나라와 청나라는 차이나족의 역사가 아니라 한겨레의 한국사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이들 나라의 풍속과 전통에서도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사책은 이들 나라를 차이나족의 역사로 보고 우리국책에 담아놓지 않고 있다. 차이나족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이 금나라, 청나라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켜 버렸다. 이를 위해서 민족영웅이라고 하는 ‘악비’ 장군조차 더 이상 민족영웅이 아니라고 한다. 이들은 자기 조상을 부정하면서 까지 정치적 패권을 달성하려고 하고 있다. 지구상에 오랑캐가 있다면 폐륜을 서슴치 않는 차이나 공산당정권이라고 할 것이다. 이들은 이미 ‘문화대혁명’이라는 전력前歷를 갖고 있다. 공산주의 사상에 반대된다는 이유로 ‘홍위병’을 앞세워 전통역사문화유적과 유산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훼손하였다. 그래놓고 이제는 역사공정을 하면서 중화민족의 위대함을 과시하려는 전략에 따라 파괴 훼손한 유물과 유적 유산을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하여 다시 복구시키고 있다. 이들이야 말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파렴치한 오랑캐들이라고 할 것이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중공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침탈에서 보듯이 지금도 살아남느냐 도태되어 사라지느냐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역사는 개인에게도 ‘나’자신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정체성을 심어준다. 해외로 입양된 아이가 커서 기어이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누구인지 이억 만리를 마다하지 않고 모국을 찾아 뜬 눈으로 밤을 보낸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본능적인 몸부림이다. 하물며 그 부모를 있게 한 역사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어떻겠는가, 당장 자신에게 상관없는 이야기 같으나 결국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을 휘감고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 왜 우리가 우리의 바른 역사를 알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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