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중국의역사

고종이 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신라 vs 당나라 - 나당전쟁

반응형

10년(670) 봄 정월에 [당나라] 고종이 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良圖)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이는]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였

으므로 황제가 책망하고 노하여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던 것이다. 3월에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

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이르렀는데,

말갈 군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4월 4일에

마주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3월 설오유와 고연무가 정예군사 2만을 가지고 압록강 너머의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말갈 군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4월 4일에 마주싸워 이겼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에서 지켰다.

5월 후퇴

6월에 고구려 수임성(水臨城) 사람 대형 모잠(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

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

도(史冶島)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6월 고구려 잔존 세력 집결 시작.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하였다.

고구려 부흥 운동 지원.

가을 7월에 왕은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도독부에 보내 화친

을 청하였으나 [도독부는] 따르지 않고, 사마(司馬) 예군(軍)을 보내 우리를 엿보게 하였다. 왕은

[그들이]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예군을 붙잡아 두어 돌려 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

를 쳤다.

가을 7월에 도독부 침.

품일, 문충, 중신, 의관(義官), 천관(天官) 등이 성 63곳을 쳐서 빼앗고 그 사람들을 내지(內地)

로 옮겼다. 천존과 죽지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을 목베었으며, 군관과 문영 등은 12성을 빼

앗고 오랑캐 군사를 쳐서 7천 명을 목베었으며 빼앗은 말과 병기들이 매우 많았다. 왕이 돌아와서

중신, 의관, 달관, 흥원 등은 사(寺) 군영에서 퇴각하였으므로 그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하지

만 용서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창길우(倉吉于)일(一)에게 각각 급찬의 관등을 주

고 조(租)를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백제 땅을 야금야금 먹기 시작.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안승을 고구려왕 책봉


12월에 토성(土星)이 달에 들어갔고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중시 지경(智鏡)이 물러났다. 왜국

(倭國)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해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이렇

게 이름붙였다고 하였다. 한성주 총관 수세(藪世)가 백제의 [6글자 결락]를 취하고 저쪽으로 가려

다가 일이 발각되어 대아찬 진주(眞珠)를 보내 목베었다.

11년(671) 봄 정월에 이찬 예원(禮元)을 중시로 삼았다.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공하여 웅진 남

쪽에서 싸웠는데, 당주(幢主) 부과(夫果)가 죽었다. 말갈 군사가 쳐들어와 설구성(舌口城)을 포위

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장차 물러가려 하자, 군사를 내어 쳐서 300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구원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眞功)·아찬 등을 보내 군사를 이

끌고 옹포(甕浦)를 지키게 하였다. 흰 물고기가 [원문 10자 결락] 뛰어들었는데 한 치(寸)였다. 여

름 4월에 흥륜사 남문에 벼락이 쳤다. 6월에 장군 죽지(竹旨) 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백제 가림

성(加林城)의 벼를 짓밟게 하였다. 마침내 당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워 5천3백 명을 목베고

백제 장군 두 명과 당나라 과의(果毅) 여섯 명을 사로잡았다.
671년 정월에 백제를 침공, 웅진 남쪽에서 승리한다. 6월 석성에서 당군과의 결전에서 대승을

거둠.

 

가을 7월 26일에 당나라 총관 설인귀(薛仁貴)가 임윤법사(琳潤法師)를 시켜 편지를 보내왔다.
설인귀가 7월 쯤에 회유실시. 신라 거부.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삼았다. 9월에 당나라 장군 고간(高侃

) 등이 번방의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대방(

帶方)을 침입하였다. 겨울 10월 6일에 당나라 조운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郞將) 겸이대후(鉗

耳大侯)와 병사 100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급찬

당천(當千)의 공이 첫째였으므로 사찬의 관등을 주었다. 
신라 방비. 9월에 고간이 4만명을 이끌고 평양에 주둔. 겨울 10월 6일 당나라 조운선 70여척을

공격. ; 신라 보급 교란.

 

12년(672) 봄 정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 고성성(古省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2월에 백제의 가

림성(加林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명, 이근행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일시에 평양에 이르러 여덟 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주둔하였다. 8월에 당나라

군사가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기고, 군사를 백수성(白水城)으로부터 500

보쯤 떨어진 곳까지 전진시켜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맞아 싸워 수천 명을

목베었다. 고간 등이 후퇴하자 석문(石門)까지 뒤쫓아가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하여 대아찬 효

천(曉川), 사찬 의문(義文)·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

양신(良臣) 등이 죽었다. 한산주의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였다.
672년 1월 백제 고성성 정복. 2월에 백제의 가림성 결전 패배. 7월 당군 4만이 평양에 주둔. 8

월 당나라 백수성까지 진군. 백수성에서 싸움 접전을 벌임.

 

9월에 살별[彗星]이 북방에 일곱 번 나타났다. 왕은 지난번 백제가 당나라에 가서 호소하고 군사를

청하여 우리를 쳤을 때, 사정이 급박하여 황제께 아뢰지 못하고 군사를 내어 쳤었다. 이 때문에 당

조정으로부터 죄를 얻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급찬 원천(原川)과 나마 변산(邊山)을 보내 붙잡아 두

었던 [당나라] 병선 낭장(兵船郞將) 겸이대후, 내주 사마(萊州司馬) 왕예(王藝), 본열주 장사(本烈

州長史) 왕익(王益),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軍), 증산 사마(曾山司馬) 법총(法聰)과 군사 170명을

돌려 보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려 죄를 빌었다.
신라 당나라 회유 시작.

 

13년(673) 봄 정월에 커다란 별똥별이 황룡사와 재성(在城) 중간에 떨어졌다. 강수(强首)를 사찬으

로 삼고 해마다 조[租] 200섬을 주었다. 2월에 서형산성(西兄山城)을 증축하였다. 여름 6월에 호랑

이가 대궁(大宮) 뜰에 들어왔으므로 죽였다. 가을 7월 1일에 유신이 죽었다. 아찬 대토(大吐)가 모

반하여 당에 붙으려 하다가 일이 탄로나 목베여 죽임을 당하고 처와 자식들은 천인(賤人)으로 만들

었다.
673년 7월 1일 김유신 사망. 대토가 모반하려다 죽음.

 

8월에 파진찬 천광(天光)을 중시로 삼았다.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증축하였다. 9월에 국원성(國原

城),옛날의 완장성(長城)이다.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

若州)의 주양성(走壤城),또는 질암성(迭巖城)이라고도 하였다. 달함군(達含郡)의 주잠성(主岑

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 왕

이 대아찬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당의 군사가 말갈

·거란 군사와 함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왔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 우리 군사가 이겨 2천여 명

을 목베었고 당의 군사 중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 강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셀 수 없었다.
8월, 9월 성벽 보수. 당과의 해전에서 호로와 왕봉에서 대승.

 

겨울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을 공격하여 항복시켰고, 거란·말갈 군사는 대양성

(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공격하여 멸하였다. 처음으로 외사정(外司正)을 두었는데, 주(州)에

두 사람 군(郡)에 한 사람이었다. 일찍이 태종왕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수자리 군사를 없앴으나 이

때 이르러 다시 두었다.
당나라 동자성까지 진군.

 

14년(674) 봄 정월에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대나마 덕복(德福)이 역술(曆術)을 배워서 돌아와

새 역법으로 고쳐 사용하였다.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

고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니, 당나라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로써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 우효위원외대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김인문이 당의 서울[京師]에

있어, [그를] 신라 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유인

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

근행으로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왔다.
당,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삼아 이근행 등을 보내어 침략시작.

 

2월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가을 7월에

큰 바람이 불어 황룡사 불전을 무너뜨렸다. 8월에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9월에

의안법사(義安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고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봉하였다.[문무왕] 10

년에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였는데 지금 다시 봉한 것이다. 보덕(報德)이란 말이 귀순[歸命]한

다는 말과 같은 뜻인지 혹은 땅 이름인지 모르겠다. 영묘사 앞 길에 나아가 군대를 사열하고, 아

찬 설수진(薛秀眞)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관람하였다.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하고, 군사 훈련시킴.

 

15년(675) 봄 정월에 구리로 각 관청 및 주·군의 인장(印章)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2월에 유인

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칙으로 이근행을 안동

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경략케 하였다. 그래서 왕은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사죄하니 황제

가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김인문은 중간에서 [당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를 임해

군공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빼앗아 드디어 고구려 남쪽 경계지역에 이르기까

지를 주와 군으로 삼았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침략해 온다는 말을 듣고 아홉

부대의 군사[九軍]를 내어 그것에 대비하였다.
철중성에서 신라군이 패배. 신라와 당나라 정전.

 

가을 9월에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風訓)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가 본국에서 처형당한 것을 이

용하여 풍훈을 이끌어 길잡이[鄕導]로 삼아 천성(泉城)을 쳐들어 왔다. 우리의 장군 문훈(文訓) 등

이 맞아 싸워 이겨서 1천4백 명을 목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감에

전마(戰馬) 1천 필을 얻었다. 29일에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

였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쫓고 말 30,380필을 얻었으며 그 밖의 병기도 이만큼 되었다. 사신

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關)과 성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鐵關城)

을 쌓았다.
9월 신라 천성에서 대승. 9월 29일 매초성에서 승리.

 

말갈이 아달성(阿達城)에 침입하여 노략질하자 성주 소나(素那)가 맞아 싸우다 죽었다. 당나라 군

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소수(小守) 유동(儒冬

)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赤木城)을 에워싸 멸하였다. 현령 탈기(脫起)가 백성을 거느리

고 대항하여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다시 석현성(石峴城)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는데,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또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열여덟 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이겨서 6,047명을 목베고 말 200필을 얻었다.
칠중성에서 신라 수성. 적목성에서 패배. 석현성 함락. 다시 신라가 반격해서 18번 싸워 대승.

 

16년(676) 봄 2월에 고승 의상(義相)이 왕명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였다. 가을 7월에

살별[彗星]이 북하(北河)와 적수(積水) 두 별 사이에서 나타났는데 길이가 6∼7보쯤 되었다. 당나

라 군사가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해 와 함락시켰는데, 현령 거시지(居尸知)가 전사하였다. 양궁(壤

宮)을 지었다.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

에서 싸우다가 크게 패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4천여 명을 목베

었다. 재상 진순(陳純)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주었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