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중국의역사

2500년전 월나라의 수도 서예의 성지 소흥, 700년의 역사마을 제갈팔괘촌

반응형

춘절 연휴를 이용해서저희는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출발 날짜인 15 아침부터 비가 내리더니, 절강성에 들어서면서 간밤에 내린 덮인 벌판을 보면서

날씨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무척 추웠습니다.

눈도 내리고 진눈깨비에 부슬부슬 비도 내리고

먼저 도착한 커쵸우-소흥 지역의 체감 온도는 온몸을 달달달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1년에 한번 눈이 올까 말까하는 커쵸우-소흥을 방문해서 눈덮힌 절경을 구경할 있었던 것은

쉽게 접할 없는 행운이었던 같습니다.

춘절이어서 인지갑작스럽게 취소되는 예약등으로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무사히 즐거움 속에 다녀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첫날 방문지 소흥绍兴(샤오씽)

절강성 항주와 닝보의 중간 지점에 있는 도시. 공식적인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의 시조, 우왕의 능이 있고, 춘추전국 시대엔 월나라의 수도로 번성했던 도시, 와신상담의 주인공인 구천이 오나라의 부차에게 쫓겨 도망갔던 그 회계산이 도시의 남쪽을 감싸고 있고, 작가 노신의 고향으로, 주은래의 고향으로 유명하고, 또 홍주의 대표격인 샤오싱주로 유명한 곳~

도시 곳곳을 감싸고 흐르는 운하와 하얀 벽에 검은 기와가 멋지게 어우러진 물의 도시~

소흥은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수향 도시입니다.

의류 가공공장이 소규모에서 대규모로 다양하게 형성되어 있어전 세계로 수출을 하고 있으며,한국의 동대문 제품의 주류가 이곳이기도 하답니다. 특히 넥타이는 전 세계시장의 70%를 이 지역에서 공급하며, 특히 원단(화섬)은 중국 내 최대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중국 내 대 도시는 물론, 전 세계 주요시장의 원단 공급처랍니다.

중국 8대 명주 중 하나인 황주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황주는 크게 여아주와 장원홍(女兒酒壯元紅)으로 나누어 지는데 정혼이 되어 남자 집에서 여자 집으로 예물을 보낼 때 술은 필수품이고, 결혼 후 여자가 시집에 갈 때 술을 지참하는데 이를 ‘女兒酒’라고 한답니다. 이 ‘여아주’의 풍속에 대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여자 아이가 태어나서 몇 해가 지나면 술을 많이 담그는데, 딸이 성장하여 성혼을 할 때 개봉을 해서 손님에게 접대를 하며 그 술을 ‘女酒’라고 했다고 합니다.

찹쌀을 먼저 씻고, 좋은 누룩을 사용하며, 소흥 鑒湖의 물로써 담그는데, 술을 담그면 술 단지의 주둥이를 연 잎으로 덮고, 누런 진흙으로 막아, 그늘지고 서늘하며 건조한 밀실에 두기도 하며, 벽과 벽 사이에 두기도 합니다. 그리고 딸이 성인이 되어 성혼을 하면, 술을 들어 내어 남편집에 갈 때 지참을 시킨답니다. (대략 14~20세 정도 시집을 갔으니 14~20년 산이 되는 셈이지요.)

이 술은 담그고 십 수년이 지난 후 개봉을 하기 때문에 아미노산이 많아 몸에 좋으며, 술이 많이 증발을 하여 술의 양이 절반 혹은 그 이하로 되는 경우가 많으나 술의 농도는 진해지고, 색이 진해지고, 깊은 맛이 난다고 합니다.마실 때는 반드시 적당량의 新酒를 섞는데, 술의 향기가 방에 가득 차고, 맛이 순수하여 특별한 술이랍니다.

하나가 ‘壯元紅’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술 단지에 주홍색을 칠한 것인데, 속칭 ‘元紅酒’라고도 한답니다.소흥의 보통사람들이 아들을 낳으면 술 단지 몇 개에 주홍 색을 칠하는데, 이는 “장래에 과거에 장원을 하라”는 기원이 담겨있고, 또한 “나날이 불이 훨훨 타오르듯이 잘 살아라” 는 의미로 술 이름을 “壯元紅”이라 한다고 합니다.

이젠 저희들이 다녔던 여행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번째 방문지 - 가암풍경구柯岩

천하제일 돌과 절이 있으며, 수나라 당나라 때는 돌을 캐는 광산이었다는데 얼마나 많은 돌을 파냈는지 파낸 곳에 물이 고여 호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가암은 소흥 12km 서쪽에 위치하며, 가암풍경구와 감호, 그리고 노신의 소설을 토대로 만든 노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彌勒大佛, 雲骨, 普照寺 등 역사적인 유적과 三聚同源 石像, 社臺, 越中名士院 등 현대작품들이 어우러져 좋은 쉼터를 이루고 있습니다.

미륵대불은 예전 뒤편의 돌산을 캐내다 남겨진 것을 수나라 때 조각하기 시작하여 당나라 때 완성 됐다고 하며 어느 석공이 불심의 발원으로 조각을 시작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자 그 아들, 손자대로 이어저 완성했다 합니다. 미륵바위의 높이가 20.8m 불상의 크기가 11.3m 로 불상의 양쪽 귀가 서로 통해 있다 합니다.

미륵대불 바로 옆엔 촛대를 땅에 박아 놓은 듯한 운골이란 바위가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아래 면을 보면 바람만 조금 세게 불어도 넘어질 것 같은 모습입니다. 높이가 30m 아래 편 제일 얇은 부분이 1m 랍니다.

뒤론 동진시대에 세워진 '보조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월왕 구천이 와신상담 끝에 오나라와의 복수를 위한 전쟁을 시작할 때 고을의 노인이 오래된 황주를 구천에게 꼭 승리해서 돌아오라고 진상을 한 술을 구천이항아리의 술을 흐르는 강물에 쏟아 모든 병사들이 마실 수 있게해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는 고사를 재현해 놓은 곳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배를 타고 감호를 거슬러오다 내려주는 곳이 바로 노신의 소설 속의 내용들로 독특한 거리를 만들어 놓은 노진魯鎭 입니다. 모두 노신의 소설에 나타나는 사람들과 거리를 재현해 놓았습니다. 이곳에 가시면 살아있는 아큐와 공을기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약 두시간의 시간으로 구경을 하였으나, 가암풍경구의 모든것을 탐미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습니다.4시간 정도 여유를 갖고 작은 오봉선(소흥특색 쪽배)을 타고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아도 지루함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아서 주변의 풍경이 아주 멋있었습니다. 절강성에서 눈을 보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설경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두번째 방문지 - 난정蘭亭

소흥시 서쪽 교외에 위치하여 있으며, 오래된 정원으로 서예의 성지 입니다. 월나라 구천왕이 이곳에 난을 심었다고 해서 난정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동진 시대의 대서예가인 왕희지가 영화구년(서기353)3월초에 친구인 사안과 손작등 42인들과 함께 이곳에 모여 곡수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는데 그 중에 26인이 37수의 시를 썼고 이를 모아 난정집서를 발표하면서 부터 난정이 유명해 졌다고 합니다. 왕희지가 유난히 거위를 좋아해서 1700년이 지난 지금도 거위를 방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난정에 있는 "흑지"입니다. 연못물이 먹물처럼 검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유상곡수는 굴곡지게 만든 수로를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워 놓고,이 술잔이 각자 앉은 자리에 오면 들어 술을 마시고 시 한 수 지으며 즐겼던 시회(詩會)를 말하는데 연꽃 속에 술잔을 넣어 물에 띄우며, 시를 짓지 못한 사람은 벌칙으로 술 석 잔을 더 마셔야 했다고 합니다. 왕희지는 이곳 난정(蘭亭)에서 가깝게 지내는 문인을 초대해 유상곡수를 즐겼던 것입니다. 이때 지어진 시를 모아 만들은 난정집의 서문이 난정 안의 어비정에 새겨져 있습니다.
유상곡수 하면 경주의 포석정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난정은 포석정과 달리 자연석을 이용해 곡수(
曲水)를 만들었고 그 규모도 훨씬 크다는 점이 다르답니다.

정문에 들어서서 얼마쯤 걷다보면 첫 눈에 "아지"라는 비석이 보이는데 거위 "()"자와 못 "()"자가 틀림을 대뜸 알아볼 수 있습니다. 왕희지와 그 아들 왕헌지가 한자씩 썼기 때문입니다. 왕희지가 ""자를 금방 썼는데 마침 임금의 성지가 도착했고 사자를 맞이하려 간 아버지대신 아들 왕헌지가 ""자를 마감하였다 하여 부자비라고도 하는데 서예사상의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답니다.

왕씨 부자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남겼는데, 헌지가 어렸을 적엔 큰 재목감이 아니였던가 봅니다.

10여년간 글 공부를 했지만 시종 아버지의 승인을 받지 못했답니다. 한번은 나름대로 괜찮게 썼다는 글을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가면서 이번에도 아니라면 글공부고 뭐고 다 팽개칠 생각이었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 글씨를 본 아버지는 천둥같이 화를 내면서 들었던 붓을 종이위에 탁 팽개치고 나가버렸답니다. 억울해난 헌지가 어머니를 찾아가 하소연 하는데 그 글들을 찬찬히 보던 어머니가 왈

"? 여기 글 같은게 있구먼은..."

그래서 그 어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자신이 글을 쓴 종이 위에 찍힌 왕희지가 화를 내면서 던져버린 붓 자리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었답니다. 왕희지의 글 공력을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그만큼 왕희지는 서예에 혼신을 다 받쳤다고 합니다.

왕희지가 죽고 5백년 후 중당의 문인 류종원(柳宗元)은“아름다움은 스스로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탓에 사람을 통해 그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난정이 왕희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맑은 여울과 긴 대나무가 한갓 빈산의 잡초 속에 묻혔을 것이다!” 라고 왕희지를 칭송하였답니다..

지금의 건축과 정원은 명대 말기(1548)에 중건하였고, 안에는 아지(鵝池), 소난정(小蘭亭), 유상곡수(流觴曲水), 유상정(流觴亭), 어비정(御碑亭), 왕우군사(王右軍祠) 등의 건물이 있습니다.

 

세번째 방문지 - 루쉰기념관

중국의 근대작가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는 루쉰(魯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기념관 안에는 루쉰의 육필 원고와 편지 등 600여 점의 사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기념관 바로 옆에 있는 루쉰의 생가에는 침대가 놓인 침실, 당시 사용했던 조리기구가 놓인 부엌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작은 운하를 건너가면 루쉰이 12~17세까지 공부하던 삼미서옥(三味書屋)이 있는데, 이 곳에는 조()자가 새겨진 루쉰의 책상도 볼 수 있답니다.

魯迅 1881 9 25일 절강성 소흥생으로 집안은 꽤 큰 지주 사대부로 조부가 당시 과거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국사편찬 한림학사였으며 당시 중앙 관료에 대한 명망은 대단히 높았답니다. 때문에 노신은 여섯 살부터 공부를 시작했고 낙원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답니다.
그러나 13세 때 가정의 중심이자 경제적 지주였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 후 16세에는 오랫동안 폐결핵으로 고생한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나면서 그의 생활은 곤궁해졌습니다. 풍요에서의 추락을 통해 노신은 인심이란 연기 같은 것이어서 손바닥만 뒤집어도 걷잡을 수 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회를 보는 태도에 결정적 작용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노신고가가 있는 곳입니다. 지금은 관광객을 위해 상업거리로 바뀌어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함형주점은 원래 노신이 죽고난 후 남은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개점을 하였다가 장사가 안되 망한 곳을 중국 정부가 인수해서 관광지로 개발 운영하고 있답니다.

광인 일기 아큐정전 등 그의 대표적 작품이 실린 소설집인 납함( ) 의 첫 이야기 자서(自序)에는 그 당시의 감정을 자세히 서술해 놓았는데

'일찍이 나는 4년 남짓한 동안 거의 매일같이 전당포와 약방을 드나들었다. 몇 살 때인가는 잊었지만, 아무튼 약방 계산대가 내 키만큼 높았고, 전당포의 그것은 내 키의 배나 되었다. 나는 내 키의 배나 되는 계산대에 옷이며 머리 장식품 따위를 내밀고 경멸 섞인 눈초리를 받으며 돈을 받아 든 다음, 내 키만큼 높은 한약방의 계산대로 가서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위해 약을 지었다. 하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아버지의 병은 날로 심해져서 끝내 돌아가시고 말았다. 남부럽지 않은 생활에서 갑자기 밑바닥 생활로 떨어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그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의 숨김없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며 그 시절의 고통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노신이 태어난 19세기 후반은 중국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습니다.

아편 전쟁 후, 몰려 오는 서구 세력들 때문에 온갖 혼란에 빠져 있던 중국, 태평천국의 난, 양무운동, 청일전쟁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건들이 그 동안 중화사상에 젖어 있던 중국인들을 당황케 하였고, 중국은 이제 더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서구세력에 의해 농락당하고, 짓이겨지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진 폐쇄적인 가치관인 보잘 것 없는 국수주의 때문이었습니다.

노신은 이런 중국인들을 개조하고 싶었고 세상에 대해 열린 시각을 가지고 약육강식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910년 쌰오싱 중학교의 교감이 되었으나 다음해인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淸朝) 지배기구는 속속 무너졌고 그는 새로운 도독(지방군권 장악자)에 의해서 교장에 임명되었지만 그의 학생 중 하나가 도독을 비판하는 신문을 냈기 때문에 기피인물로 지목되어 이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으며

1912 1월 난징에서 중화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는데, 1912 5월 정부가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그도 베이징으로 이사하여 그 후 15년 간 교육부관리로 사회교육국에 근무했으나 오래된 탁본을 모아 그것을 베껴 쓰거나 오래된 소설집을 교정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들이 '적막감'에 사로잡힌 영혼의 고통을 마취시키는 방법이었다고 스스로 말하곤 했습니다.

신청년이란 잡지책을 출판하던 그의 친구 김심이 베낀 비문을 읽어 본 후, "왜 글을 쓰지 않나?" 라고 물었을 때

노신이 "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세. 창문은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어. 안에는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이 많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혀 죽고 말 거야 그러나 혼수상태에서 그대로 죽음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니까 죽음의 괴로움 따위는 느끼지 않아.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운다면, 이 불행한 몇 사람에 게 결국 살아날 가망도 없이 임종의 괴로움만 주게 되는 셈이네.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지 않는가?" 라고 말하자

김심이 "그러나 몇 사람이 깬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의 말을 들은 노신은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쓴 글이 1918 신청년 5월호에 실린 광인일기입니다.

루쉰의 〈광인일기〉는 '문학혁명' 주장을 최초로 실천한 작품입니다. 구어적 표현을 채택한 이 작품은 유교의 억압적인 도덕이 '사람이 사람을 먹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암시하고 이것을 미친 사람의 입을 통해 대담하게 말한 내용으로, 결말은 "어린이를 구하라"는 말로 맺고 있습니다. 중국의 장래를 위해 이제부터 새로운 사람은 유교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광인일기 , 1921년 베이징의 신문 〈천바오〉 부록판에 연재된 〈아Q정전은 노신의 문학적 지위를 확립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Q'라는 날품팔이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봉건적인 중국사회가 만들어낸 민족적 비극을 풍자하여 전형화한 것인데, 독자들은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아Q 기질에 충격을 받았고 이 작품은 곧바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1930년에 ' 중국좌익작가연맹'[左聯]이 출범했는데 루쉰은 그 발기인이 되었고 1932년 말 국민당 민중탄압 격화에 항의하여 '민권보장동맹'이 성립하자 루쉰은 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으며. 1933 6월 동맹의 간사장(幹事長)이 대낮에 저격당하여 죽고 루쉰도 또한 암살명단에 올라 있다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그는 아파트 방에 틀어박혀 예전과 마찬가지로 집필활동을 계속하다가 결국에는 폐병에 걸려1936 10 19 56세의 나이로 병사했으며 이때 학생과 시민 조문객은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당시 그의 관을 덮은 것은 '민족혼'이라는 검정 글씨가 쓰여진 흰 천으로서 상하이 시민대표가 증정한 것이었고 그는 '만국공묘'의 한 구석에 안치되었습니다.

 

네번째 방문지 - 부산공원 府山公園

부산공원은 2500년전 춘추시대 월나라의 궁전이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전쟁에 패한 월나라 왕 구천이 곰의 쓸개를 씹으며 복수를 다짐했다는 "와신상담()" 고사의 무대로, 공원 안에 있는 월왕대(越王台)와 월왕전(越王殿), 비익루() 등이 그 당시의 사연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는 일정에 쫒겨 미쳐 다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왔습니다.

와신상담은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와 월나라 간의 싸움에서 전해지는 고사이며 가시가 많은 나무짐 누워 자고 쓰디쓴 곰 쓸개를 핥으며 패전의 굴욕을 되새겼다는 뜻으로, 갖은 고생 끝에 목적을 이룬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주인공은 오월동주(吳越同舟)의 두나라 오의 부차와 월의 구천인데
진시황의 천하통일로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기 전,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상이 극에 달했던 기원전 4세기 초. 월왕 구천에게 패해 전사한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는 가시나무 장작더미 위에서 자며(臥薪)사람들이 드나들 때 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하고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월왕 구천은 싹을 자르려 오나라를 쳤지만 회계산(會稽山)에서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오나라의 속국이 될 것을 맹세하고 풀려난 구천은 자리 옆에 매달아 놓은 곰 쓸개를 핥으며(嘗膽) 회계의 치욕(會稽之恥)을 잊지 않으려 자신을 채찍질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20여 년, 구천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거꾸러뜨렸고, 구천의 미인계에 놀아난 부차는 결국 나라를 망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회계산에 사오싱에서 제일 큰 공원인 부산공원(府山公園)이 조성돼 있는 데 공원 앞 월왕전에 구천의 상담(嘗膽)벽화가 그려져 있고 망해정에 오르면 탁트인 전망을 즐길 수 있는데 쌰오싱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답니다.

 

다섯번째 방문지 - 쌍용동굴 华双龙风

아름다운 동굴이었습니다. 겨울에 하는 동굴여행을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쌍용동굴 풍경구 내에는 빙호동, 쌍용동, 조진동등 수많은 석회동굴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가장 아름답다는 쌍용동과 빙호동을 저희는 방문하였습니다. 특히 이날은 추운 날씨에 눈까지 내려서 흐르는 계곡물에서 품어내는 물안개와 설경이 어울려진 주변의 풍경이 정말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쌍용굴은 석회암 동굴로 입구가 매우 좁아 배를 타고 몸을 숙여야 겨우 지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넓어지는 커다란 동굴의 웅장함에 한번 놀라며, 석회암이 녹아내려 형성된 동굴 내부의 기괴한 암석들과 다양한 종유석들을 접하게 되고, 좁다란 통로를 따라 올라가면 빙하동하고 연결이 되는데 수량이 엄청난 동굴 벽을 뚫고 굵은 물줄기를 품어내는 폭포가 천지를 진동합니다.

그 폭포를 지나 출구로 나오자 펑펑 내리는 눈으로 옷을 해 입은 수많은 나무들과 함께 어울려진 주변 풍경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주위에 수십 개의 석화동굴들이 있으며,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73M의 동굴 안 폭포가 신비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석회암은 먼먼 고대의 조개 따위 껍데기를 가진 생물들의 유해가 굳어져 생성된 물질인데 그 껍데기에 탄산칼륨성분이 풍부해 석회암으로 변하고 이런 석회암에 이산화탄소가 섞인 지하수가 석회암지대에 생긴 틈서리를 따라 오래 오래 흐르노라면 석회암이 점차 녹아내리며 동굴이 만들어진답니다.

그 기간은 수백 수천만 년의 장구한 지구 지질년대를 거치여오는 긴 시간입니다. 이런 지구 지질년대에 이산화탄소가 많이 녹아 내릴수록 동굴이 더 빨리, 더 크게 형성된다고 합니다.

쌍용굴을 거쳐 빙하굴을 지나 외부로 나오니까 이런 절경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섯번째 방문지 - 난계지하장하溪地下

절강성 서남단 난계시에 자리하고 있는 지하장하는 중국에 보기드문 천연지하수로입니다. 그 길이가 무려 2.4km, 총면적 25,000m2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지하수로 내부로 들어서면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두 곳의 동굴을 구경한다는 것에 지루함을 더 할까 봐 걱정을 하였지만, 지하장하는 정말 선택을 잘 하였던 것 같습니다. 동굴 입구에서 7~8명의 인원을 작은 배에 태우고 전문 뱃사공이 동굴내부로 실어나릅니다. 좁디 좁은 동굴 수로를 이동할 때 벽에 부딫치고, 좁은 수로를 배 두대가 간신히 비켜가면서 지하수로를 이동하는 스릴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하장하는 거대한 석회석 동굴로 형성된 지하 수로입니다.

곳곳에 기괴한 형상의 석주와 종유석 그리고 꼬불꼬불한 지하수로는 신비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중국에 참 많은 관광지가 있지만, 이곳 지하수로는 꼭 방문해 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은 곳입니다.

들어갈 때는 배를 타고 들어가고 나올 때는 수로 옆으로 형성된 자연 통로를 따라 내려오는데 추운 바깥 날씨와는 다르게 안에는 따뜻해서 좋았습니다.

 

일곱번째 방문지 - 제갈촌 葛八卦村

제갈 팔괘촌은 제갈공명의 구궁팔괘진에 따라 배치된 마을입니다. 마을 전체는 거대한 살아있는 문물이 고 중국 옛 마을과 옛 민가가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마을은 명. . 양 대의 집들이 200여 채가 있습니다.

이곳에 완전하게 보존된 원, , 3대의 고 건축과 문물의 보고였습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지금부터 약 700여년 전의 건축물도 있었습니다.

700여년 이래 왕조의 교체, 사회 동란, 전쟁의 난리 속에 수많은 중국의 명루고찰, 원림 대각이 전화로 불타고 혹은 전재로 훼손되었는지만, 이곳의 큰 마을은 마치 세외도원처럼 전화에서 멀리 떨어져, 천재를 피하고 인화를 피했다고합니다.

제갈량의 원적은 낭양양도 (현 산동성 기남)이고, 그가 재상이었던 촉나라는 현재의 사천으로 절강 란계에서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의 후손들이 어떻게 이곳으로 와서 모여 살면서 번성 했을까 ?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제갈 량의 제 14세손 제갈 이가 절강성 수창현에서 현령을 하다 수창에서 죽었는데 그가 절강 제갈씨의 시조이며, 제갈 이의 아들 제갈 청은 북송 천회 2(1018) 란계로 이사 왔고 제갈청의 아들 제갈승재는 란계에서 10대를 전하고 제갈대사에 이르러 온 집안을 데리고 고융(즉 현재의 제갈팔괘촌)으로 이사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원대 중기(서기 1340년 전후)입니다.

마을 곳곳에 골동품 먹거리 등을 파는 제갈씨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건물들이 전부 오래된 건물입니다. 물어보면 400년전, 500년전, 700년전 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합니다. 2~300년전의 건물은 여기선 오래된 건물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하더군요..ㅠ.ㅠ

이 지역의 제갈 가족들은 선조 제갈 량의 가르침인 "양상(훌륭한 재상)이 되지 못하면 양의(훌륭한 의사)가 되라"는 뜻을 받들어 그들은 성심껏 한약업을 경영하고 양약을 만들어 장강 남북에 팔아 재산을 모아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제갈촌의 대경당(중약전람관)은 제갈 승재 가족이 한약업에서 성취한 것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을 전체의 절대 다수의 사람이 모두 1700여년 전 촉의 재상 제갈량의 후손입니다. 온 마을 사람은 거의가 성이 제갈씨이고 혹은 제갈씨한테 시집온 부녀자이고 극소수만이 제갈 가족의 성원이 아니라고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 제갈 량의 후손은 모두 16,000명인데 제갈팔괘촌 하나에 모여 사는 사람이 1/4이다고 합니다
.
제갈팔괘촌은 국가급 중요 문물 보호 단위로 규정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마을에는 명대에 지어져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관청과 제갈 량 사당 등 불거리가 많았습니다. 민가도 대부분 명, 청대에 지어진데다 아름답게 장식된 기둥과 대들보 등이 소박하고 단아한 멋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제갈촌 제일의 명물은 동네 중앙에 있는 팔괘도식의 못인 종지(鍾池)입니다. 못에서 음을 대표하는 반은 물에 잠겨 있고 양을 대표하는 반은 말라 있는데 지금도 촌민들은 이 못에서 옷을 빨기도 하고, 음식물을 씻기도 합니다.

못은 주변의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제갈촌에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제갈 팔괘촌은 제갈량의 구궁팔괘진과 그 모양이 일치한다고 하는데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9 8괘의 배치에는 변함이 없다고 합니다.

1925년 북벌 전쟁 기간 난방의 국민 혁명군의 초경광부대와 군벌 손전영 부대가 제갈 촌 부근에서 3일간의 격전을 벌였는데 놀랍게도 마을에 총알이나 포탄이 떨어지지 않았고 마을전체가 손상됨 없이 안전하였고 항전(항일)시기에는 일본 군대가 마을 밖의 고융강의 큰 길을 지나면서도 전혀 이 마을을 발견치 못했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단 한번 일본 비행기에서 투하한 탄환이 마을의 한 집을 폭파한 것 뿐이라고 합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저곳에서 동네 어르신들 모여 마작도하고 담소도 나누고 합니다. 중국 농촌의 한가로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갈팔괘촌은 가가호호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등을 기대며 종횡으로 뻗은 길들이 통한 듯 막혀있습니다.
외부인이 무턱대고 마을에 들어갔다가는 잘아는 사람을 따라서 길을 가지 않으면 종종 들어가서는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도적이 무턱대고 들어왔다가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메다가 바로 잡혔다고도 합니다.

700년의 역사가 살아있고 기이함과 신비로움이 가득한 마을 제갈팔괘촌 이었습니다.

 

먹을거리 및 기타정보

팔괘촌의 다관가의 첫번째 집의 빠오즈(만두소 들어있는 찐빵)와 챠오미시엔(볶은 쌀 국수)이 훌륭하답니다.
현지 특산 채소로 만든 볶음 요리도 먹을 만하고. 시장 통에서 파는 꿀에 잰 대추는 5위안에 한 봉지로 싼 가격에 비해 맛이 대단히 좋답니다. 우리 엿과 비슷한 중국식 호박엿도 맛이 있고, 공명소병은 돼지고기소를 넣어 겉은 바삭바삭 하고 속은 향기롭습니다. 시장 통에서 나무로 된 공명쇄(자물쇠) 를 파는데 현지 자물쇠 장인의 말에 따르면 작은 종류가 진짜고 큰 것은 외지에서 만든 모조품을 들여와 판다고 합니다.

 

진화무이 칭수완온천두자촌

익히 명성은 들었지만 한국의 온천 레저타운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시설을 잘 해 놓은 최고급 온천이었습니다. 이날은 춘절이어서인지 수많은 중국인들이 이용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도 사람이 많아 탈의실 옷장을 두 사람이 하나를 이용하게 하는 중국인 특유의 상술에 놀라움을 표할 따름이었습니다.

온천장 내부에는 수영장, 파도풀장, 공연을 보면서 온천을 즐길 수 있는 곳, 가족단위로 이용할 수 있는 소규모 풀장, 찜질방, 한증막, 마사지실, 출출함을 채울 수 있는 다양한 간식판매대 등이 어울러진 온천레져타운 이었습니다. 5성급에 전혀 부끄럽지 않은 시설이었습니다.

아침에 상해에서 금화 가는 동처(쾌속열차)를 이용하시면 가족과 함께 하루 코스로 여유롭고 낭만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저희는 1박2일의 일정으로 절강성 소흥과 금화를 다녀왔습니다.

많은 사진을 찍었으나 게시판 용량 관계로 다 올리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함께 참여하여 즐거움을 나눌 수 있었던 분들에게 고생하셨단 말씀과 여행기간 내내 불편한 부분도 많았을 텐데

웃음으로 답해주셔서 감사하단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