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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한국의역사

신비에 쌓인 조선의 역사 117가지 신비에 쌓인 조선의 역사 72가지 [1. 현중국인의 증언] 1. 현중국의 한 학자가 한글재단 이사장에게 말하였다.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를 감추고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주)"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 박사가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당시 같은입학생인 중국 학자 서량지가 박사를 찾아와 말하기를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를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읍니다. 본인(서량지) 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의미로 절을 하겠으니 받아달라며 큰 절을 올렸다." 한편,1930년대 현중국인 장려화와 그 문하생들의 노력으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이편찬되면서, 중국에서의 우리 조.. 더보기
백제시조는 부여왕 구태/해상강국의 기반은 서남해 해상세력 [구당서 백제전]"백제의 영토는 서로는 바다(서해)를 건너 월주(양자강 지역)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발해만)를 건너 고구려와 접하고 남으로는 바다(남해)를 건너 왜(일본열도)에 이른다" 아시아 해상국가 백제의 기반세력은 고대부터 해상루트를 개척하여 고인돌.옹관문화를 유럽.중동까지 전파한 서남해 마한(일본의 뿌리모국)의 해상세력이다. 해상강국 백제 시조는 동명성왕(고두막)의 후손인 부여왕이며 요동태수 공손탁의 사위 구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을 인용하여, "부여왕 동명(고두막)의 후손 구태(仇台)란 자가 있어 매우 어질고 신실했는데, 대방(帶方)의 옛 땅(한반도=마한)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이 자기 딸을 구태에게 시집 보냈으며 .. 더보기
백제의 영토'에 대한 환상에서 부디 깨어나시길 이 사진은 우리가 국사책에서 흔히 보던 백제의 전성기(4C경)의 그림입니다. 이 사진에서 보면 백제의 영토는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과정을배운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기에 PASS 이 지도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한듯한데, 옛 지명과 현대의 지명을 섞어 표기한 점입니다. 현대에는 동해라고 부른다지만, 당시에는 고구려의 내해로 즉 '창해'라고 불렀습니다. 한강은 '아리수'... 태왕사신기에서 담덕이 왕에 오른 다음 백제를 치기 위해서 현고등과 회의를 하는 씬입니다. 저 지도에서 보시면 백제는 한반도에 백제와 서백제(西百濟)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태왕사신기가 환타지 사극이란 이유때문에 사실 신뢰가 잘 안가죠. MBC 태왕사신기는 애초에 '판타지 드라마'라는 간판을 내.. 더보기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 1. 요동 공손씨 정권의 흥망 중원에 풍운이 몰아치고 있었다. 풍운은 교룡들의 용틀임을 부른다. “푸른 하늘 이미 죽었으니(蒼天已死) 마땅히 누런 하늘이 서리라(黃天當立)” ‘황건 농민혁명’의 구호이다. 역사는 아직도 이를 ‘황건적의 난’으로 부른다. 후한 말 외척과 환관들의 전횡으로 정치는 썩고, 호족과 지주들에 의한 토지겸병과 수탈로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민중들은 후한의 왕조를 부정하고 새 세상을 꿈꾸었다. 서기 184년 일어난 ‘황건 농민혁명’은 204년까지 장장 20여 년 동안 끈질기게 이어졌고, 그 여파로 후한은 결국 220년 몰락하였다. 그러나 민중들이 꿈꾸었던 태평성대는 오지 않았다. 후한의 왕조를 대신하여 위‧오‧촉 삼국과 요동의 공손씨 정권이 일어나 중원의 패권을 다투었을 뿐이다. .. 더보기
바다 동쪽에 강성한 나라 '해동성국' 1.바다 동쪽에 강성한 나라 '해동성국'!~ 흑수말갈! 발해 견제, 당에 귀의하다!~ 중국 산둥성 동북쪽에 위치한 등주. 높은 절벽으로 둘러싼 난공불락의 요새다. 732년 이곳에 대군이 나타났다. "발해 말갈이 등주를 공격하여 자사 위준을 죽였다." - 구당서 기습공격을 감행한 이들은 순식간에 성을 함락하고 자사 위준을 죽였다. "발해라고 하면 대조영이 고구려를 계승해 세운 나라 정도로 알고 계실 겁니다. 헌데 발해가 어떤 나라였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신생국이었던 발해가 어떻게 당나라를 선제공격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유례없던 정벌을 감행한 사람은 바로대조영의 맏아들 무왕이었습니다." 중국 북동부에 위치한 지린성 둔화(敦化)시. 시 외곽 벌판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 있다. 해발 600미터, .. 더보기
광개토태왕이 대국을 건설하기 이전 고구려는 국가적 위기를 겪었다. 광개토태왕이 대국을 건설하기 이전 고구려는 국가적 위기를 겪었다. 하나는 11대 동천왕 때 위나라의 공격으로 고구려 도성인 환도성이 함락되고 동천왕이 남옥저까지 피신한 것이요, 또 하나는 16대 고국원왕 때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의 공격으로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고 태후 주씨와 왕후, 그리고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이 탈취당했을 뿐 아니라, 백제와의 싸움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한 것이다. 대개 고국원왕에 대해서 그를 비운의 왕이라 보고 그의 시기를 고구려 총체적 위기의 시대라 평한다. 하지만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를 국가 부도의 위기라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수림왕 3년, 고구려는 율령을 반포하고 체제정비를 통해 대국으로서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런데 갓 즉위한 소수림왕 때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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