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한국의역사

바다 동쪽에 강성한 나라 '해동성국'

반응형

1.바다 동쪽에 강성한 나라 '해동성국'!~

흑수말갈! 발해 견제, 당에 귀의하다!~

 

 

중국 산둥성 동북쪽에 위치한 등주.

높은 절벽으로 둘러싼 난공불락의 요새다.

732년 이곳에 대군이 나타났다.

"발해 말갈이 등주를 공격하여 자사 위준을 죽였다." - 구당서

기습공격을 감행한 이들은

순식간에 성을 함락하고 자사 위준을 죽였다.

"발해라고 하면 대조영이 고구려를 계승해 세운 나라 정도로 알고 계실 겁니다.

헌데 발해가 어떤 나라였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신생국이었던 발해가 어떻게 당나라를 선제공격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유례없던 정벌을 감행한 사람은

바로대조영의 맏아들 무왕이었습니다."

중국 북동부에 위치한 지린성 둔화(敦化)시.

시 외곽 벌판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 있다.

해발 600미터,

동모산 곳곳엔 유적이 있다.

 

산중턱에 움푹 패인 구덩이.

땅을 파고 돌을 쌓아 만든 우물이다.

산의 동쪽과 서쪽 두 군데 이런 우물터가 있다.

산 중턱의 나즈막한 언덕.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성벽이다.

성벽은 성을 타원으로 감싸며 산을 이룬다.

이 성의 이름은 성산자 산성.

대조영은 동모산에 성을 쌓고 나라를 이루었다.

만주 벌판에 부활한 고구려의 후예다.

 

대조영은

당이 고구려 유민들을 해체하기 위해 만주에 흩어놓은 유민들과

말갈족을 모아 당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추격해온 당의토벌대를대파한 후

698년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고 당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받아들여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발해는 건국초부터 영역을 확장해갔다.

 

최전성기 발해의 영역은 남북으로대동강에서 흑룡강까지 이르렀고 동서로는 중국 요동에서 러시아 연해주까지 이르렀다.

전성기 고구려의 영역을 넘는 우리 역사상 가장 드넓은 영토였다.

 

이런 발해를 두고 중국은 해동성국, '바다 동쪽에 강성한 나라'라고 불렀다.

 

719년 3월.

발해 건국자 대조영이 사망했다.

건국 20년, 새나라엔 아직 할 일이 많았다.

발해의 미래는 대조영의 큰아들 대무예(大武藝)에게 맡겨졌다.

그가 바로 발해 2대왕 무왕이다.

무왕은 즉위 직후부터 정복사업에 나섰다.

 

무왕은 옛고구려의 땅을 향해 진격해갔다.

발해는 동북쪽으로 뻗어나가 여러 민족들을 차례로 복속했다.

"동북의 오랑캐들이 두려워하였다." - 신당서

 

722년 당 현종은 뜻밖의 손님을 맡는다.

 

발해의 영향력 아래 있어야 할

말갈족 추장이 찾아와 조공을 바친 것이다.

현종은 그를 크게 반기고 벼슬까지 내리며 환대했다.

그 부족은 흑수말갈(黑水靺鞨)이었다.

흑수말갈은 누구일까?

말갈족은 전통적으로 그들이 사는 지역을 부족명으로 사용해왔다.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이곳에 흑수가 흐른다.

시베리아 남동부에서 발원해 오우츠크까지 흐르는 흑룡강.흑수말갈은 대대로 흑룡강 근처에서 살아왔다.

 

이들은 현재 나나이족이라 불린다.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나나이족은 1만 4천여 명.나나이족은 이곳에서 천 년 넘게 그들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흑수말갈은 중국 동북족의 말갈족 중 가장 강력한 부족이었다.

신당서는 이들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다.

"사람들이 거세고 보병전을 잘하여 늘 다른 부족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성질이 잔인하고 사나우며 수렵을 잘한다."

- 신당서

강 주변에서 살아가던 흑수말갈은 물고기 껍질로 옷을 만들었다.

이들은 수렵을 하고 전투력도 강했지만 식량과 철등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나나이 원주민들은 목축과 농경은 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웃 민족인 중국이나 한국(발해) 등과 짐승 가죽 등으로 물물 교환을 해서 식량을 조달해야 했다."

-니콜라예브나(52세), 하바로프스크 박물관흑수말갈은 부족한 물품을당과의 교역을 통해 얻었다.

이 교역은 발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돌연 흑수말갈이 당에 직접 조공을 함으로써 이 질서를 깨트린 것이다.

"흑수말갈 입장에서는 다른 말갈들이 발해에 예속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 당과 교류한 것이죠."

흑수말갈은 계속 당과 교류했다.

2년에 걸쳐 네 번이나 사신을 파견했다.

725년.

당은 급기야 흑수말갈의 영토에 관청을 설치했고(黑水府), 관리까지 파견했다(長史).

당의 직접 통치가 이뤄진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발해가 세력을 확장하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안심할 수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다른 세력을 이용해 견제하는 수밖에 없다.

 

당나라와 흑수말갈 사이에는 견제해야 할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

당나라도 원하고 흑수말갈도 원하는 것, 그것은 바로 발해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해에는 위기였다.

무왕은 당에 왕위 계승자인 대도리행(大都利行)을 파견했다.

발해의 왕자는 당의 조치에 항의했다.

그러나 당 현종은 묵묵부답이었다.

"흑수말갈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러 당나라와 통교하였다.그런데 지금 당나라의 관리를 요청하면서 우리에겐 알리지 않으니이는 필시 당나라와 앞뒤에서 우릴 공격하려는 것이다.

무예와 장임이발은 군사를 거느리고 흑수를 공격하도록 하라."

- 구당서 중

무왕은 동생에게 흑수말갈을 정벌할 것을 명령한다.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2.형제의 다른 꿈!~

당 선제공격을 반대하는 동생 대문예!~

"무왕이 즉위한 8세기.

중국 동북부에선 발해와 당, 그리고 중국 북방민족들이 한데 엉켜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당은 중앙아시아까지영토를 확장했고 그 서쪽에는 거란과 발해, 흑수말갈이, 동북쪽에는 돌궐이 있었습니다.

만약 흑수말갈이 당과 손을 잡을 경우 발해는 앞뒤에서 공격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무왕은 공격을 결정하게 됩니다."

무왕에겐 믿을 만한 장수가 필요했다.

무왕은 동생을 선택했다.

그런데 대문예의 반응은 의외였다.

 

"흑수말갈이 당에 관리를 요청하였다고 하여 바로 공격한다면 이는 당과 등지는 것입니다.

당나라는 사람이 많고 군사가 강하기를 우리의 만 배나 되니 하루 아침에 원수가 되는 것은 스스로 멸망하는 것입니다."

당의 영토가 된 흑수말갈을 공격하면 당과 적이 된다는 이유였다.

중국 시안(장안).

당시 당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통일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의문명을 흡수한 당은 세계최고의 문화와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강력한 군사와 무기를 갖춘 세계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건국 초기 당에 인질로 끌려가 8년 동안 머물렀던 대문예는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둘다 대조영의 아들이니까 건국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들을 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특히 동생 대문예 같은 경우는 당과의 국제교섭이 이루어진 시기에 계속 당에 파견되어서 인질로 오래 있었습니다.

대외정책에 있어서 대문예가 한 역할을 결코 작다고 할 순 없겠죠."

그러나 무왕은 대문예의 말을 무시하고 그를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흑수말갈의 국경지대에서 대문예는 무왕에게 상소를 올린다.토벌 계획을 취소하라는 내용이었다.

무왕은 분노했다.

왕은 즉각 대문예를 소환했다.

토벌대의 사령관을 사촌형대일하로 교체하고 계획대로흑수말갈을 정복하도록 했다.

무왕은 왜 강대국 당에 맞서는 정책인 줄 알면서도 이토록 끈질기게 흑수말갈을 정복하려했을까?

당과 발해 사이엔 돌궐과 거란, 해족이 있었다.

무왕은 당과 대립하는 이들 부족들이 당과의 사이에 완충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당이 섣불리 발해를 공격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당나라의 가장 큰 적은 동돌궐이었다.그리고 그 외에 당나라와 관계가 밀접했던 거란족과 해족도 큰 골칫거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흑수말갈과 당나라의 관계는 이들 다른 세력들로 인한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대문예는 형의 소환에 응하지 않고 군영을 탈출했다.726년. 그는 당에 망명했다.

당 현종은 대문예를 크게 환영하고 좌효위장군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무왕은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왕은 당에 사신을 급파해 당 현종에게 국서를 전한다.

대문예를 죽이라는 요구였다.

"발해 내부에는 왕자들이 여러 명 있고 대문예도 그 중 한 명이었을 것이고,당나라 유학파들도 꽤 있었을 것인데,

대문예의 망명을 무왕이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당 중심적인 분위기로 가는 것을 방치하게 될까 우려되어동생의 행동에 대해 응징을 하려 했지 않나 이렇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당 현종은 무왕의 요구를 무시한다.

현종은 발해에 대문예를 멀리 귀양 보냈다고 편지하고 대문예를 다른 곳으로몰래 피신시킨다.

"현종이 몰래 문예를 안서 지방으로 보냈다."

그러나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현종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안 무왕.이후 당에 보낸 국서에는 외교 전례상 유례없던 파격적인 내용이 등장한다.

신생국 발해 젊은 무왕이당 황제 현종을 꾸짖었다.

"무왕은 거듭 당에 청해서 동생을 처형할 것을 요구합니다.

친당파를 제거해야 당에 예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대문예는 형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대문예는 발해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당에 대항하는 것은 자멸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문예의 생각은 결국 당이 발해의 내정에 개입할 명분을 주게 됩니다.

당 현종에겐 발해왕의 친동생인 대문예를 이용해 발해의 내분을 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대문예를 사이에 두고 당과 실갱이가 한참이던 728년 4월. 발해에 부고가 전해진다.

당에 가 있던 왕자 대도리행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왕위 계승자가 죽자, 당의 태도가 달라진다.

당 현종은 대문예를 죽이라는 무왕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한다.

 

"경은 당나라의 은혜를 모르고 마침내 배반하려고 한다.

경이 믿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짐은 근래 관용을 품고 중원을 다스려 왔으나경이 명을 받들지 않으면 언젠가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 당 현종

 

"대도리행의 사망으로 차기왕이 없는 상황에서 대문예를 왕으로 어쩌면 올릴 수 있다는 시위 효과가 있었다고 추정이 됩니다."

자칫하면 왕권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상황.무왕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압록강으로 군사를 이동시켰다.

압록강과 그 지류인 포석하가 만나는 곳.발해시대 이곳에 박작구라는 큰 포구가 있었다.

발해의 군사들은 이곳 박작구에 집결했다.박작구는 발해의 서쪽이었다.발해의 서쪽에서 당으로 가기 위해 이곳 박작구를 거쳐야 했다.

"박작구는 당시 발해에서 서해로 통하는 유일한 항구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발해가 이 지역에 군사를 집결시켰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무왕은 당번 장문휴에게 당 정벌을 명했다.장문휴는 수개월에 걸쳐 박작구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출격 준비를 마쳤다.

732년 9월 드디어 출격 명령이 내려졌다.우리 역사상 최초로 해외원정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함대는 박작구를 통해 압록강을 지나 황해로 진격했다.목적지는 중국 산둥반도였다.

 

3. 발해 최초 해외 원정!~

당의 해로 거점 등주와 육로마도산 공격 승리!~

"드디어 발해는 당나라 정벌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길은 바다였습니다.

발해는 건국한 지 불과 삼십여 년 밖에 안 되는 나라였지만 그들은 수나라와 당나라를 물리친 막강한 고구려 수군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발해 수군의 공격 목표는 바로등주였습니다."

당나라 등주는 지금 산둥반도 동북쪽에 위치한 펑라이시다.

당시 등주는 북방 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로 무역의 거점이었다.

수많은 무역선들이 황해를 통해 등주로 들어왔다.

"무역에 있어서 이 곳은 수나라와 당나라 때 남북을 잇는 중요한 항구였다.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일본이나 한반도, 발해국에게도 중요한 곳이었다.

등주항은 북방 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이자

전체 수.당 시기 동안 가장 중요한 항구였다."

또한 등주성은 당 수군의 거점이었다.

배를 성 안에 정박시키는 등주의 수성.

수. 당 시대, 중요한 공격이 있을 때마다 전국의 조선 기술자들이 이곳에집결했다.

공격에 대비해 배를 만들고 물자를 수송하는 일이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배를 출격시킨 곳도 모두 이곳 등주항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만에 건국된 발해 지배층들이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봤을 때,

 

당이 발해를 공격한다면 아마도 등주에서 수군이 출발할거라는 것을 전략적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왕은 치밀한 계산 아래 등주를 공격 목표로 정했다.선제 공격으로 당 수군의 거점을 무너뜨려야 그 후 당의 공격을 원천 봉쇄할 수 있었다.

 

732년 9월 5일.

발해군은 마침내 등주성을 공격했다.

발해군의 기습적인 상륙작전.

전투 중 당나라군은 치명적인 손실을 입는다.

등주의 군사와 행정을 모두 책임진 자사 위준.그가 발해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발해가 당을 공격했다는그 자체는 고구려와 발해 사이에서, 한국사에서 왕조가자체적으로 공격했던 일은 없었던 일이었고,

그것도 평화시기에 당나라 공격을 결정했다는 것,이것은 굉장히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당나라 선제공격은 대성공이었다.

당 현종은 급히 토벌대를 보냈지만 발해군의 기세를 꺽지 못했다.

당황한 현종은 신라를 끌어들인다.

선덕여왕에게 벼슬까지 높여주며 10만 명의 병사를 요청했고 신라는 이를 받아들인다.

 

 

 

"신라는 통일 과정에서 당과좀 거리가 있게 되었어요.

그런 거리감을 회복하는 예가 신라가 당과 함께 발해를 공격한것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신.당간에 관계를 회복하는 좋은 기회로 신라가 발해를 적극적으로 성토하고 군대를 지원하는 배경이 아닌가 봅니다."

현종은 장수까지 직접 지목을 하며 신라의 공격에 기대를 건다.

현종이 지목한 인물은 김윤중,그는 삼국통일의 영웅이었던 김유신의 손자였다.

733년 1월 신라는 약속대로 공격을 감행한다.

경주를 출발 발해 남쪽 국경을 향해 출발한다.

그런데 복병을 만난다.

날씨였다.

추위와 눈보라 때문에 결국 신라의 원정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돌아오고 만다.

무왕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선제공격으로 당의 심장부인 등주를 공격했습니다.

이 선제공격은

강대국 당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당 현종은 비수를 꺼내 들기 시작합니다."

당 현종은 발해를 직접 토벌하기로 한다.

현종은 사령관으로 새로운 인물을 발탁한다.

그는대문예!

발해 무왕의동생이었다.

현종은 대문예를 이용하기로 했다.

대문예를 발해토벌군의 선두에 세워 발해와 맞서게 한 것이다.

발해토벌군의 지휘관이 된 발해왕자.

그는 동족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이제 대문예는 완벽한 반역자였다.

무왕은 비밀리에 작전을 시작한다.

당나라의 동쪽 수도였던 낙양.

당시 대문예는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낙양은 등주와 장안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무역과 외교를위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천진교는 낙양의 거점이자 상징이었다.

"천진교 주변은 매우 번화한 곳이었다.

다리의 남쪽 지역은 술집도 많고 상당히 넓었다.

그래서 큰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 궈 소우 린 교수, 낙양 사범대 역사학과

733년 1월, 이 다리 위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낙양에서 토벌을 준비하던 대문예.

낙양에서 천진교로 들어서는 순간 괴한들의 습격을 받는다.

무왕이 보낸 암살단이었다.

대문예는 도망쳐 살아 남았다.

그러나 당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암살기도에 현종은 분노했다.

현종은 낙양에 침입한 발해 자객을 모두 잡아들여 처형했다.

현종도 반격에 나섰다.

이번에는 중원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진황도시 천룡민족 자치현과 승덕시 관성민족 자치현 경계에 위치한 도산,

도산의옛이름은 마도산이었다.

733년. 마도산에 발해군이 공격해 들어왔다.

등주 공격에 이은 2차 정벌이었다.

마도산 공격은 1차 공격 때와는 달랐다.

이번엔 무왕이 직접 진두지휘했다.

"이것은 뭐냐면 발해가 전통적으로 해군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존에 있던 고구려의 육로와 해로를 다양하게 이용했던 것이죠.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무왕의 당나라에 대한 적극적인 응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왕이 이끄는 발해군은 맹렬한 기세로 당군을 제압했다.

당은 군사를 추가로 증강해 발해군을 저지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발해군은 마도산 일대를 휩쓸며 승승장구했다.

"당시 당나라는 1만 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발해국의 대무예와 전쟁을 하기 위해 말이다.

구당서 기록에 따르면 대략 6천명이 사망했다.

신당서는 1만 명이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이 전쟁에서 당나라는 비교적 심각한 손해를 입었다."

전투에 참가했던 당나라 군사의 묘비명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관리와 백성들이 달아났다."

"본업을 상실했다."

당의 군대는 전멸했다.

세계 최강 군대는 무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2차 공격에 나선 발해군은 동모산에서 출발해 영주를 거쳐 마도산에 이릅니다.

마도산 바로 아래에는 중국 본토의 경계선이 있습니다.

바로 만리장성입니다.

당의 입장에서는 마도산이 뚫리면 만리장성까지 공격 당할 수 있는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발해군이 마도산을 넘어 만리장성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발해군의 2차 공격은 당을 긴장하게 했다.

발해군이 만리장성까지 임박한 상황, 중원이 위태로웠다.

당 현종은 마도산에 새로운 장군을 급파한다.

이미 두 차례 발해와의 전투에서 패한 당나라군.

군사의 수도 발해군에 못미쳤다.

정면대결은 무리였다.

당은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는 전략을 세웠다.

마도산엔 돌이 많았다.

당의 대책은 전투에서 이길 수 없었던 당의 필사의 방어책이었다.

당시 당이 쌓은 장벽은 400리에 이르렀다.

"발해국의 군대와 당나라 군대는 수적인 면에서 대등하지 않았다.

당나라 군대의 수가 적었다.

돌을 길게 쌓아 장벽처럼 만든 것이다."

"요충로를 막고 큰 돌로 400리에 걸쳐 막으니 적들이 들어오지 못하였다." - 신당서

"그것을 어떻게 막아내느냐에 급급했던 것이죠.

당나라 쪽에 기록을 보면

400리에 이르는 담을 쌓아 무왕의 진격을 막았다고 했을 정도로,

무왕의 당나라에 대한 응징은

당나라로 하여금 다시한번 발해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무왕 천도 단행, 중경으로!~

당은 가까스로 발해의 진격을 막았다.

그리고 마도산 정벌을 계기로 발해를 다시 보기 시작한다.

국가적 자신감을 얻은 무왕은 그에 걸맞는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간다.

중국 지린성 헤룽(和龍)시.

넓은 평야 한가운데긴 성벽이 있다.

서고성이다.

흙을 켜켜이 쌓아 만든 성.

발굴 결과 왕성급 토성으로 밝혀졌다.

성터에선 짐승머리 기와 장식, 연꽃무늬 장식, 호랑이 머리 장식 등

최고급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두 차례의 당 정벌 후

무왕은 이곳 중경 서고성으로 수도를옮겼다.

중경은 첫수도였던 동모산의 서남쪽 지점에 위치한다.

건국 40년, 무왕은 대대적인 천도를 단행한 것이다.

"발해건국 자체가 위급한 상황에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그 장소 자체가 국가 도성으로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성 입지에 맞는 적당한 조건을찾았는데 그곳이 현주(중경)이었습니다.

현주는 동모산 돈화 지역에 비해 날씨가 적당하고 주변 여건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천도는 무왕의 야심찬 계획이었다.

좁은 동모산을 벗어나 강이 흐르는 넓은 분지에 도성을 세웠다.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는데

외성의 둘레가 3킬로미터, 내성 둘레는 1킬로미터에 이른다.

확인된 궁전터만 다섯 군데.

무왕은 새로운 나라에 걸맞는 새로운 도성을 세웠다.

두 차례의 당 정벌로 발해의 힘을 입증한 무왕.

그는 국가적 자신감을 선포한다.

발해 무왕.

그는 냉철한 판단과 대담한 전략으로 대제국 발해의 꿈을 열었다.

"무왕은 건국한 지 불과 30여 년 밖에 안 된 발해를 이끌고

당시 세계 최강인 당을 선제공격해서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후 당은 섣불리 발해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했고

무왕은 국정을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발해의 당 정벌은 신생국이지만 결코 당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결과 발해는 세계 최강의 당나라조차도 쉽게 넘보지 못하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