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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한국의역사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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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동 공손씨 정권의 흥망

중원에 풍운이 몰아치고 있었다. 풍운은 교룡들의 용틀임을 부른다.

“푸른 하늘 이미 죽었으니(蒼天已死)

마땅히 누런 하늘이 서리라(黃天當立)”

‘황건 농민혁명’의 구호이다. 역사는 아직도 이를 ‘황건적의 난’으로 부른다. 후한 말 외척과 환관들의 전횡으로 정치는 썩고, 호족과 지주들에 의한 토지겸병과 수탈로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민중들은 후한의 왕조를 부정하고 새 세상을 꿈꾸었다. 서기 184년 일어난 ‘황건 농민혁명’은 204년까지 장장 20여 년 동안 끈질기게 이어졌고, 그 여파로 후한은 결국 220년 몰락하였다. 그러나 민중들이 꿈꾸었던 태평성대는 오지 않았다. 후한의 왕조를 대신하여 위촉 삼국과 요동의 공손씨 정권이 일어나 중원의 패권을 다투었을 뿐이다. 대륙의 동북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구려도 피비린내 나는 전운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6년(184)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쳤다. 왕은 왕자 계수(須)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은 친히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대와 좌원에서 싸워서 이겨 벤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공손도가 요동태수로 부임한 해를 『후한서』‘원소유표열전’은 서기 184년이라 하였고, 『삼국지』‘공손도전’은 동탁이 집권한 서기 189년으로 적고 있다. 따라서 서기 184년에 고구려를 침략한 요동태수가 공손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공손도가 ‘황건 농민혁명’의 풍운을 타고 요동 땅 일각을 장악한 것은 분명하다.

『삼국지』‘공손도전’에 의하면 공손도는 요동태수로 부임한 후, 동쪽으로 고구려를 치고 서쪽으로 오환을 공격하여 위엄을 해외에 떨쳤다. 또 요동군을 갈라 요서중료군遼西中遼郡을 설치하고 태수를 두었으며, 바다를 건너 동래東萊의 여러 현들을 거두고 영주자사營州刺史를 두었다.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에 올랐다.

그 후 고구려에서 발생한 ‘발기의 난’으로 요동 땅을 모두 차지한 공손씨 정권은 공손도(재위 189~204), 공손강(재위 204~220), 공손공(재위 220~228), 공손연(재위 228~238)으로 이어지며 50여 년 동안 하북성 요동 땅을 지배하게 된다.

중국 정사인 『삼국지』에 기록된 ‘발기의 난’을 다시 살펴보자. 고구려의 중심이 오늘날의 하북성에서 요령성으로 이동하는 비운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이 ‘발기의 난’을 이해하지 못하면 고구려의 초기 역사를 이해하기 어렵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초기 역사 불신론이 나오는 배경이 된다.

“백고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는 어질지 못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고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족胡族 5백여호를 받아들였다.

건안(建安, 196~219년)년간에 공손강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대가와 함께 각기 하호 3만명을 이끌고 공손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 날 항복했던 호족胡族도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그 아들은 고구려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박위거駮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토를 공격하므로 현토군과 요동군이 힘을 합쳐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

위 내용은 공손씨 정권이 요동에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된 배경과, 고구려가 하북성 요동을 상실하고 현 요령성 요하 부근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역사를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발기의 난’이 일어날 당시 고구려의 인구는 3만호였다. 그런데 발기와 고구려 서부인 연노부가 각기 하호 3만명을 이끌고 공손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 유역에 옮겨 살았다고 하였다. 그 규모로 보아 고구려 서부 전체가 투항하였으며, 고구려의 발상지였던 비류수 지역도 이때 공손강에게 넘어갔다. 그로 인하여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다(伊夷模更作新國)”고 하였다. ‘발기의 난’으로 고구려는 발상지였던 하북성 요동 땅을 모두 상실하고, 요동의 동쪽 1천여 리로 천도하여 새로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한편 ‘발기의 난’으로 하북성 요동을 모두 차지한 공손강은 대방군을 신설하고, 왜倭와 한韓을 복속시키는 등 승승장구하게 된다. 『삼국지』에 의하면 이 때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고 하였다. 사방 4천리 강역을 한반도 내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대륙에도 한韓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의 하북성 중부 호타하滹沱河 남쪽 지역이다. 대방은 호타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세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한韓’

“(후한의) 환제·영제 말기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후한의) 군·현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

건안 연간(A.D 196~220)에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장창 등을 파견하여 한漢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한·예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 한韓’

『삼국지』‘무제기’와 ‘공손도 전’에 따르면 건안 12년(207년) 위나라의 조조가 3군 오환을 정벌하고 유성(柳城, 현재의 북경 부근임. 참고로 통설은 유성을 요령성 조양으로 보고 있다)을 도륙했다. 원소의 아들인 원상 등이 요동으로 달아나니 공손강이 원상을 참수해 그 수급을 보냈다. 조조가 공손강을 양평후에 봉하고 좌장군으로 임명했다. 공손강이 죽자 아들인 공손황과 공손연 등이 모두 어렸으므로 그 무리들이 공손공을 요동태수로 삼았다. 황초 원년(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제위에 올라 공손공을 거기장군, 가절로 임명하고 평곽후平郭侯로 삼았다.

당초 공손공은 병으로 음경이 소실되어 고자가 되었고, 유약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 태화 2년(228년), 공손연이 공손공을 위협하여 그 지위를 빼앗았다. 태화 7년(233년) 공손연은 오나라 사자 장미, 허안 등을 참수하여 위나라로 보내고 대사마에 임명되고 낙랑공에 봉해졌다.

요동에 공손연이 등장할 무렵 중원의 형세를 살펴보자.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220년 낙양을 중심으로 위나라를 건국하였고, 뒤를 이어 유비가 221년 파촉 땅의 성도를 중심으로 촉한을 건국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손권이 229년 건업을 중심으로 오나라를 건국하여 중원은 삼국정립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편 고구려는 제11대 동천왕(재위 서기 227~248년)이 제위에 올라 잃어버린 요동 회복의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땅에는 그 임자가 있는 법이다. 하북성 요동 땅은 지정학적으로 발해만을 배경으로 한 해양세력의 중심지이며,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북방의 유목세력과 접하고, 태행산맥을 넘어 중원의 농경세력과 접하는 요충지이다. 그러므로 3대 세력인 해양세력과 유목세력 및 농경세력들 간의 이해관계를 적절하게 조절할 역량을 지닌 자만이 임자가 될 수 있는 땅이었다. 불행히도 공손연은 그럴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였다. 지나치게 재물을 밝히고 의리를 가벼이 여기며, 표리부동함으로써 주변국들과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었다.

“공손연이 사자를 보내 남쪽으로 손권과 서로 통하고 왕래하며 선물을 주고받았다. (233년) 손권은 장미張彌, 허안許晏 등을 시켜 금옥진보金玉珍寶를 보내고 공손연을 연왕燕王으로 삼았다. 공손연은 손권이 멀리 있어 의지할 수 없다는 점을 두려워했으나 또한 화물貨物이 탐이 났으므로, 그 사자들을 유인하여 장미, 허안 등을 모두 참수해 (위나라 조정으로) 보냈다. 이에 명제明帝는 공손연을 대사마에 임명하고 낙랑공, 지절에 봉하고 예전처럼 군을 다스리게 했다” 『삼국지』‘공손도 전’

당시 오나라 손권은 위나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요동의 공손연과 그 동쪽의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다. 공손연은 북방 유목민들의 명마를 오나라에 중계하여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오나라와 동맹을 원하는 한편으로 인접한 위나라의 세력이 두려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공손연을 도모하고 요동을 회복하려는 고구려 입장에서는 멀리 있는 오나라보다는 위나라와 동맹을 맺는 것이 유리했다. 결국 고구려는 오나라 사신을 목 베어 위나라에 보냄으로써 위나라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234년) 손권이 사굉과 진순을 고구려에 보내어 고구려 왕 고궁高宮을 선우單于로 책봉하게 하자, 진순 등이 안평구安平口에 도착하였다” 『삼국지』‘오서’

“10년(236년) 봄 2월, 오나라 왕 손권이 사신 호위를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그 사신을 억류했다가, 가을 7월에 그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전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한편 위나라는 적국인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명마를 공급하고 있는 공손연이 눈엣가시였다. 서기 234년 제갈공명 사후 촉한의 세력이 약화되자, 위나라는 236년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공손연을 토벌하기로 했다. 경초 원년(237년) 유주자사 관구검을 파견하였으나, 관구검 등이 싸움에 불리하여 돌아왔다.

이듬해 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 사마의)을 보내 공손연을 쳤다. 이때 고구려도 주부 대가가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왔다. 사마선왕은 고죽국을 지나고 갈석을 넘어 요수를 건넜다. 공손연은 요동 양평성에서 항거하다가 참수되었고, 이로서 낙랑‧대방‧요동‧현토 등이 모두 평정되었다.

이제 사서를 통하여 공손씨 정권이 점거하고 있던 낙랑‧대방‧요동‧현토 등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들 지명은 고구려 역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사마선왕이 공손연을 정벌하는 과정을 『삼국지』 ‘공손도 전’과 『진서』‘선제기’ 등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필자가 비정한 낙랑‧대방‧요동‧현토 등의 지명이 올바른지 알아본다. 그리고 통설의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2. 낙랑대방창려요동현토의 위치

2천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랜 시간을 항해해왔다. 이제 저 멀리 어렴풋이 낙랑 땅이 보인다. 낙랑·대방·요동·현토 등등....... 정겨운 지명들이다. 거친 세파를 방랑하던 나그네가 그리운 고향산천을 목전에 둔 것 마냥...... 절로 시흥이 일어난다.

대륙의 동북단 자방磁方의 땅이여!

사방팔방 산하의 정기가 모여들어 새로운 세상을 열 터전이 되었구나.

자애로운 대흥안령산맥 남으로 향하고 험산준령 태행산맥은 북으로 달려가니

천고신악 갈석산이 홀로 우뚝 하여라.

 

히말라야 설원을 녹아내린 생명의 물은 대륙을 가로질러 굽이굽이 흘러가니

황하수 만리여정 갈석산에서 마감한다.

 

호탕한 대양의 기운은 해류로 북상하여 발해 중을 가로질러 황하수를 맞이하니

모든 바닷길은 왕검성으로 통하였구나.

 

반만년 전 단군임검 아사달에 도읍하사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큰 뜻을 펴시더니

고구려의 다물이요. 신라의 복본이로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오행의 화’로 신음하니 사람이 노예 되고 돈이 주인 행세를 한다.

아득히 아사달을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여라.

낙랑‧대방‧창려‧요동‧현토 등은 후한과 진晉나라의 평주지역이다. 『진서지리지』는 평주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평주平州 : 생각컨대 우공禹貢의 기주冀州 지역으로, 주周나라가 유주의 경계로 삼았으며, 한漢나라 때에는 우북평군에 속했다. 후한 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으로 불렀다. 그의 아들 공손강과 강의 아들 문의(文懿, 공손연)에 이르러 모두 멋대로 요동에 웅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魏나라는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양평에 거하였고, 요동·창려·현토·대방·낙랑 등 5개 군으로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가 후에 도로 유주에 합하였다. 공손연이 망한 후에 호동이교위를 두어 양평에 거하였다. (진나라) 함녕 2년(276년) 10월, 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 등의 5군국으로 나누어 평주를 설치하였다. 26개 현을 다스렸으며, 가구 수는 18,100호이다(平州 : 按, 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 遼東 昌黎 玄莵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䕶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玄莵 帯方 樂浪 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진서지리지』‘평주’

『진서지리지』에 따르면 낙랑‧대방‧창려‧요동‧현토가 설치된 평주지역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周나라의 유주지역이며, 한漢나라의 우북평군이라 하였다. 이 내용만으로는 평주지역의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삼국지』‘위지동이전 고구려’ 기록에 의하면 공손씨가 요동을 점거하고 있을 당시, 공손씨 요동의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의 강역이 동서 2천리였다. 또 고구려의 동쪽에는 옥저가 있었고, 옥저의 동쪽에 동해바다가 있었다. 동해바다의 위치는 확정적이다. 그러므로 동해바다 서쪽으로 순차적으로 옥저, 고구려, 공손씨 요동이 있었다. 옥저의 서쪽에 있던 고구려의 강역이 동서 2천리이므로, 적어도 고구려의 서쪽 국경이 하북성의 난하 또는 칠로도산까지 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고구려 서쪽의 공손씨가 점거한 요동은 오늘날의 하북성 지역이다.

강단사학계나 중국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공손씨가 점거한 요동을 오늘날의 요령성 요동으로 비정하면, 그 동쪽에 있는 고구려 강역은 동서 1천여 리도 되기 어렵다. 고구려 강역 동서 2천여 리는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의 수많은 정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므로 강단사학계나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은 중국 정사들의 기록과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의 수많은 정사에서 언급한 고구려의 강역 동서 2천여 리를 충족하려면 공손씨가 점거한 요동은 하북성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하북성 요동지역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지도가 바로 『기주협우갈석도』이다. 이 지도는 하북성 요동지역에 설치되었던 연나라 5군(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의 위치를 알 수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지도이다. 또 갈석산이 위치한 낙랑군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한민족 상고사에 있어서 너무나 소중한 지도이다(『기주협우갈석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제2회 참조). 이제 『기주협우갈석도』를 토대로 낙랑‧대방‧창려‧요동‧현토 등의 위치를 살펴보자.

(1) 낙랑대방의 위치

1) 낙랑군

낙랑군의 위치는 현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일대이며, 핵심지역은 조선현朝鮮縣과 수성현遂城縣이다. 조선현은 고조선의 왕검성이 위치한 곳으로 오늘날의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이며, 수성현은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된 갈석산이 있는 곳으로 지금도 수성현의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다.필자는 낙랑군의 위치에 대하여 지금까지『산해경』‧『사기』‧『부도지』등 각종 역사서를 통하여 철저히 교차 검증하였다.

①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고 하였다(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사기색은』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갈석산은 오늘날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다. 아래의 『기주협우갈석도』에 표시된 갈석산이다. 그러므로 갈석산이 위치한 낙랑군은 하북성 보정시 일대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글『부도지』로 보는 고조선의 비밀(제2회) :

② 조선은 동해의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있다.

“동해의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이라 한다. 조선은 천독天毒이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며 사랑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산해경』‘해내경’

위 구절은 조선에 대한 중국 최초의 기록으로 조선의 개략적 위치 및 조선의 정체성을 엿 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중국의 동해 안쪽과 북해(발해만 북쪽)의 모퉁이에 있었다는 것이다. 『산해경』위 구절과 관련하여 진나라 곽박(郭璞, 276~324)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고 하였다.

조선이자 한나라 낙랑군이 위치하였던 ‘중국의 동해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는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시 일대를 나타낸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글『부도지』로 보는 고조선의 비밀(제3회)

③ 조선에는 습수, 열수, 산수가 흐른다.

“장안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 열수, 산수가 있는데 세 물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 낙랑과 조선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따온 이름인듯하다(張晏曰 朝鮮有濕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사기집해』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서 조선에 대한 『사기집해』의 주석이다. 장안張晏은 3세기 위魏나라 사람이며, 조선은 조朝ㆍ한漢 전쟁이 일어났던 위만조선(BC 195 ~ BC 108) 시대를 말한다. 위만조선의 영토 내에 물길이 서로 합류하는 습수, 열수, 산수의 세 강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습수, 열수, 산수를 찾으면 위만조선의 핵심강역을 알 수 있다.

『우적도禹迹圖』와 『수경주』에 의하면 습수는 오늘날의 하북성을 흐르는 영정하永定河이다. 또 『산해경』‘해내북경’의 기록에 의하면 열수는 오늘날의 하북성을 흐르는 호타하滹沱河이다. 따라서 영정하와 호타하가 흐르는 낙랑군은 하북성 보정시 일대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글『부도지』로 보는 고조선의 비밀(제3회)

④ 아사달은 영정하와 호타하로 둘러싸인 곳이다.

“임검씨가 돌아와 부도符都 건설할 땅을 고르니, 바로 동북쪽의 자석이 가리키는 방향이었다....중략.... 이에 태백산 밝은 땅의 정상에 천부단天符壇을 쌓고, 사방에는 보단堡壇을 세웠다. 보단과 보단 사이에는 각각 세 겹의 물길을 통하니 그 사이가 천리요.....하략(壬儉氏 歸而擇符都建設之地 卽東北之磁方也....中略....乃築天符壇於太白明地之頭 設堡壇於四方 堡壇之間 各通三條道溝 其間千里也....下略)” 『부도지』‘제13장’

위 『부도지』의 구절을 해석하면 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은 오늘날 중국 하북성과 산서성을 흐르는 영정하永定河와 호타하滹沱河로 둘러싸인 곳이다. 아울러 하북성 보정시 일대의 백석산(갈석산)이 한민족의 영산 태백산이며 그 곳에 왕검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하북성 보정시 일대가 한나라 낙랑군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글『부도지』로 보는 고조선의 비밀(제4회)

 

위의 ①②③④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나라 낙랑군의 위치는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시 일대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사기색은』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서에서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고 하였다. 그리고 북송의 국방서인『무경총요』는 현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에 대하여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그 유래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광신군 치소는 수성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의 땅이다.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에는 안숙安肅군이 있고, 군에서 20리 서쪽에 장성이 있다(廣信軍治遂城縣 戰國時武遂縣地 秦築長城所起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 二十里西至長城)” 『무경총요武經總要』

현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遂城縣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이며, 진나라 만리장성이 일어난 곳임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나라 낙랑군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난하 하류나 한반도 평양 등으로 찾아 방황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다음으로 낙랑군 조선현으로 비정하는 현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의 연혁을 『중국백과사전』에서 찾아보자. 만성현의 옛 이름은 영락현永樂縣이었다.

“영락현 : 동위 흥화2년(540년) 북평현 서북의 땅을 나누어 영락현을 설치하여, 낙랑군에 속하게 하고 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제 때 영락현을 창려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주 때 영락현을 북평 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 수나라 개황3년(583년) 창려군을 파하고,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예속시켰다. 대업3년(607년) 주를 파하고 상곡군으로 하여 영락현을 관할하였다. 당나라 무덕4년(621년)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소속시켰다. 천보원년(742년) 영락현을 만성현으로 처음 변경했다(永乐县 : 东魏兴和二年(公元540年)析北平县西北境,增置永乐县,属乐良郡,同时为郡治。北齐时,永乐县为昌黎郡郡治。北周时永乐县徙治于北平故城,隋开皇三年(公元583年)罢昌黎郡,永乐县更隶易州,大业三年(公元607年)罢州为上谷郡,仍辖永乐县。唐武德四年(公元621年)永乐县改属易州,天宝元年(公元742年)永乐县始更名满城县。)”『중국백과사전』‘영락현’

만성현은 본래 영락현永樂縣으로 동위와 북제시절 낙랑군과 창려군의 치소였다. 영락永樂은 광개토태왕의 연호로, 현의 이름에 왕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왕검성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만성현滿城縣이라는 이름 역시 조선왕 만滿의 도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현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를 한나라 낙랑군 조선현으로 비정한다.

여기서 영락현이 낙랑군과 창려군의 치소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락현은 그 지명이 가지는 상징성으로 인하여 여러 차례 지명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지명이동된 곳을 본래의 낙랑군이나 창려군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위의 『중국백과사전』에서 “북주 때 영락현을 북평 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태백일사』‘고구려본기’의 “대덕 18년(576년) 병신에 임금이 대장 온달을 거느리고 갈석산과 배찰산을 토벌하러 가서, 유림관까지 추격하여 북주를 대파하였다”는 기록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나오는 갈석산이 현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에 있는 갈석산(백석산)이다. 북주가 갈석산 전투에서 고구려에게 대패함으로써 갈석산 부근의 영락현 지명을 산서성 남단으로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산서성 남단의 북평 고성 부근을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으로 오해하는 재야사학자들이 많이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영락현은 요나라가 설치했으며, 금주의 치소이다. 원나라가 (현을) 없애고 주에 편입했다. 즉 오늘날 요령성 금현의 치소이다(永乐县 : 辽置,为锦州治,元省入州,即今辽宁省锦县治。)”라는 내용이 나온다. 요나라(916년 ~ 1125년) 때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의 옛 지명인 영락현이 요령성 금주시로 지명이동된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오늘날 주류학계의 통설은 요령성 금주시 일대를 창려의 치소였던 극성으로 보고 있다. 이 부분은 뒤에 요동군 평곽의 위치를 비정할 때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2) 대방군

대방군은 낙랑군의 남쪽지역을 분할하여 만든 군이므로 낙랑군의 남쪽에 위치한다. 오늘날의 하북성 석가장시를 중심으로 한 호타하滹沱河 유역이다. 중국 최초의 지리서인 『산해경』‘해내북경’에 대방군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구절이 있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으로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산해경』‘해내북경’

위 구절에 대하여 곽박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으로 기자를 봉한 땅이다. 열列은 또한 물 이름이다. 지금 대방에 있는데 대방에는 열구현이 있다.(郭璞云 朝鮮今樂浪縣 箕子所封地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고 하였다. 열양列陽은 열수의 북쪽을 의미한다. 연나라가 열양에 있고, 그 동쪽에 조선이 있으므로 열수는 연나라와 조선의 남쪽을 흐르는 강이다. 그러면 연나라의 남쪽을 흐르는 강은 어떤 강일까?

『전국책戰國策』에 전국시대 연나라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文公, 재위 BC362-BC333)에게 한 말이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여 리 이다...중략...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天府)이다(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中略...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전국책』‘연책’

연나라의 남쪽에 녹타菉沱와 역수가 흐르며, 또 안문과 갈석이 있다고 하였다. 위 구절의 주석에서 녹타菉沱는 호타하滹沱河라 했다. 안문과 갈석은 모두 호타하의 북쪽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연나라의 남쪽을 흐르는 열수는 호타하이다. 위에서 곽박이 ‘열수가 대방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대방은 오늘날의 호타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2) 창려요동현토의 위치

창려의 중심은 용성‧극성 등이다. 용성은 하북성 북경北京 북쪽이며, 극성은 북경 동남쪽의 랑방시廊坊市 부근이다. 요동의 중심은 양평‧평곽 등으로 양평은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부근이고, 평곽은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부근이다. 그리고 현토의 중심은 하북성 승덕시承德市 부근이다.

이제 창려와 요동 등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기 위하여 위의『기주협우갈석도』를 보자. 창려군은 진晋나라가 우북평군을 폐지하고 설치한 군이므로 그 위치가 대략 고수(沽水, 오늘날의 영정하) 하류지역에 해당한다. 또 요수는 오늘날의 조백신하潮白新河이다. 그리고 요동군과 현토군은 고구려와 접경지역이며, 현토군은 요동군의 북쪽이다. 고구려와 공손씨 정권의 경계선은 하북성 칠로도산 부근이므로 현토군은 칠로도산 서쪽 장성의 북쪽지역이며, 요동군은 그 남쪽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

1) 요동군 평곽의 위치

요동군 평곽현은 오늘날의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부근이다. 평곽현은 공손씨 정권의 3대 공손공(재위 220~228)이 위나라로부터 평곽후에 봉해질 정도로 요동군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당서』『신당서』『한원翰苑』등에 의하면 평곽은 고구려의 건안성이 위치한 곳이다.

“고구려기에 이르기를 평곽성은 지금의 건안성이다. 나라의 서쪽에 있는데 본래 한나라 평곽현이다(高麗記曰 平郭城 今建安城 在國西 本漢平郭縣也)” 한원翰苑』‘고구려’

또 『대청일통지』등에 의하면 당나라 의봉儀鳳 1년(676)에 웅진도독부가 이곳 평곽현에 설치된다. 웅진도독부는 당나라가 신라의 서진을 막기 위하여 백제유민을 이주시켜 설치한 곳이다. 그러므로 평곽현의 위치는 삼국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현재 통설에서는 한나라 평곽현이자 고구려의 건안성이 위치했던 곳을 현 요령성 개주蓋州로 비정하고 있다. 개주의 옛 이름은 개평開平이다. 그러나 개평의 위치는 본래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부근이다. 지금도 하북성 당산시에 개평의 지명이 남아있다.

『태백일사』는 『삼한비기』라는 고대 문헌을 인용하여 고구려 건안성이 당산唐山 경내에 있었음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갈석산 밑에 백암성이 있으며, 이를 당나라에서는 암주라고 하였다. 건안성은 당산唐山의 경내에 있으며, 그 서남을 개평開平이라 하는데 일명 개평蓋平이며 당나라 때에는 개주蓋州라 하였다(碣石山而其下則白岩城 亦唐時所謂岩州卽此也 建安城在唐山境內 其西南爲開平 一云蓋平 唐時亦稱蓋州是也)”

이제 공손씨 정권의 요동군 평곽이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부근인지, 요령성 개주蓋州 부근인지 사서를 통해 검증해보자.

요동군 평곽현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록이 있다. 뒤에 다시 거론하겠지만 A‧D 333년 모용선비의 수장인 모용외 사후 그의 형제들 간에 내란이 일어났다. 그 때 형인 모용황은 창려의 극성에 주둔하였고, 동생 모용인은 요동의 평곽에 주둔하고 있었다. 『진서』와 『자치통감』을 통하여 창려 극성에 있던 모용황이 요동 평곽의 모용인을 치러가는 과정을 살펴보자.

“모용황이 장차 바다를 건너 모용인을 치려 하자 뭇 신하들이 모두 간하기를 ‘바닷길은 위태롭고 험하니 의당 육로로 쳐야 한다.’고 하였다. 황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바닷물이 얼지 않았는데 모용인이 모반한 이래로 세 번이나 얼어붙었다. 옛날 한 광무제가 얼어붙은 호타수滹沱水를 건너 대업을 이루었으니, 어쩌면 하늘이 내가 이를 건너 승리하도록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계획은 결정되었으니 막는 자가 있으면 벨 것이다!(皝將乘海討仁, 羣下咸諫, 以海道危阻, 宜從陸路. 皝曰:「舊海水無凌, 自仁反已來, 凍合者三矣. 昔漢光武因滹沱之冰以濟大業, 天其或者欲吾乘此而克之乎! 吾計決矣, 有沮謀者斬!)” 『진서』‘모용황재기’

“임오일에 모용황이 동생인 군사장군 모용평 등을 거느리고, 창려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얼음을 밟으며 진격했다. 총 3백여 리를 가서 역림구(歷林口, 바다의 포구이다)에 이르러 치중을 버리고 가벼운 병사들로 평곽으로 달려갔다(壬午, 皝帥其弟軍師將軍評等自昌黎東, 踐冰而進, 凡三百餘里. 至歷林口, [歷林口, 海浦之口.] 捨輜重, 輕兵趣平郭.)”『자치통감』‘권95 함강2년’

위 『진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을 통하여, 창려 극성과 요동 평곽의 상대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창려 극성의 동쪽에 요동 평곽이 있으며, 그 사이에 300여리의 바다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요동 평곽의 서쪽에 300여리의 바다가 펼쳐져 있어야 한다. 대단히 중요한 기록이다. 대륙의 동북방향에서 이러한 지형을 가진 곳은 요령성의 요동만 부근 밖에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요동군 평곽현이 통설에서 말하는 오늘날의 요령성 개주蓋州 부근이 맞는 것일까?

필자가 요동군 평곽현으로 비정하는 현 하북성 당산시 부근은 현재의 지도로 보아서는 서쪽으로 300여리의 바다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해석은 항상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해석해야 한다. 창려 극성의 모용황이 요동 평곽의 모용인을 치러가던 때는 서기 336년이다. 그 당시는 해수면이 지금 보다 약 6M정도 더 높았다(『해수면 변동 그래프』 참조).

이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해보면 『해수면 +6M 지도』처럼 된다. 이 지도를 보면 평곽으로 비정되는 당산시唐山市의 서쪽에 정확하게 300여리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또 창려군은 진晋나라가 우북평군을 폐지하고 설치한 군이다. 위의 『기주협우갈석도』를 보면 그 위치가 대략 고수(沽水, 오늘날의 영정하) 하류지역이므로, 당산시唐山市의 서쪽 바다 건너편이 창려군 지역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요동 평곽을 현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부근으로 보면 위 『자치통감』에서 “창려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얼음을 밟으며 진격했다. 총 3백여 리를 가서 역림구에 이르러 치중을 버리고 가벼운 병사들로 평곽으로 달려갔다”는 구절과 정확히 부합된다.

반면 통설에서는 창려 극성을 현 요령성 금주시錦州市, 평곽은 현 요령성 개주蓋州로 비정하고 있다. 금주시에서 개주 사이에 3백여 리의 바다가 있는 것은 일치한다. 그러나 금주시에서 개주는 동쪽이 아니라 동남쪽이므로 위『자치통감』의 구절과 방향 이 일치하지 않는다(아래의 『통설의 요령성 요동 주요지명』지도 참조). 또 위의 낙랑군 항목에서 보았듯이 요령성 금주시에 창려군의 치소와 관련이 있는 영락현永樂縣이 설치된 시기도 요나라 시기였다. 그러므로 요령성 금주시를 요나라 보다 훨씬 이전인 고구려 시대 창려로 비정하는 것도 맞지 않다.

요동군 평곽을 현 요령성 개주蓋州로 비정하는 통설이 틀렸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또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동군 평곽현은 고구려의 건안성이다. 고구려 제28대 보장왕 5년(A‧D 645)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의 일이다. 『자치통감』『구당서』등에 따르면 영주총관 장검이 행군총관이 되어 당태종과 함께 진군하였는데, 그 진군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2월 11일 당태종과 장검 낙양 출발.

2월 24일 당태종과 장검 업鄴 도착.

3월 9일 당태종과 장검 정주定州 도착.

3월 24일 당태종과 장검 정주定州 출발.

3월 ?일 당태종 장검에게 신성로로 막리지 요격 명령.

4월 ?일 장검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향함.

4월 5일 장검 건안성 공격.

4월 10일 당태종 유주 출발.

“전략.... 당태종이 매우 기뻐하며 (장검을) 행군총관으로 삼고, 겸하여 모든 번기졸을 거느리게 하고 육군전봉으로 삼았다. 이때 고구려 척후병을 사로잡았는데 막리지라 칭하는 장수가 요동에 이르렀다 하므로, 장검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신성로로부터 요격토록 했다. 막리지는 끝내 감히 나타나지 않았다. 장검이 병사를 진군시켜 요수를 건넜다. 건안성으로 달려가니 적도들이 크게 무너졌다. 수천 명을 목 베었다(前略....太宗甚悅仍拜行軍總管 兼領諸蕃騎卒 為六軍前鋒 時有獲高麗候者 稱莫離支將 至遼東 詔儉率兵 自新城路 邀擊之 莫離支竟不敢出 儉因進兵渡遼 趨建安城 賊徒大潰 斬首數千級)”『구당서』‘장검열전’

당태종과 장검의 진군일정과 『구당서』‘장검열전’을 종합해보면 장검이 3월 24일 하북성 정주를 출발하여 4월 5일 건안성을 공격하기까지 소요된 기간은 13일이다. 군대의 진군속도는 하루에 보통 40~60리 정도이다. 이를 감안하면 13일 동안 진군거리는 대략 520리~780리 정도로, 건안성이 하북성 정주에서 대략 800여리 이내에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북성 정주로부터 2천여 리나 떨어진 요령성 개주시가 건안성이 될 수는 없다.

또 당태종과 장검의 진군일정으로 보아 위 『구당서』‘장검열전’에 나오는 신성로는 현 하북성 보정시 동북 150여리에 있는 신성新城이다. 신성로로부터 요동에 나타난 막리지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요동이 하북성 보정시의 신성으로부터 요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필자가 비정한 것처럼 요수를 조백신하로 보고 건안성(평곽)을 하북성 당산시로 볼 경우 합리적인 역사해석이 가능하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사유로 현 하북성 당산시 부근이 공손씨의 요동군 평곽현이다.

① 『삼국지』를 비롯한 수많은 중국의 정사 기록에 공손씨의 요동군 동쪽에 동서 2천리의 고구려가 있다고 하였다. 공손씨의 요동군이 현 하북성에 있어야만 가능하다.

② 『기주협우갈석도』를 해석하면 우북평군 지역인 창려는 영정하 하류부근이며, 조백신하가 요수이며 그 동쪽이 요동군이다.

『당서』『신당서』『한원翰苑』등에 요동군 평곽현은 고구려의 건안성이 위치한 곳이라 하였으며, 『태백일사』는 건안성이 당산唐山 경내에 있다고 하였다.

④ 통설에서 요동군 평곽이라 주장하는 현 요령성 개주는 옛 이름이 개평開平이며, 현 하북성 당산시에도 똑같은 개평開平이라는 이름이 존재한다. 개평이 지명이동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서』‘모용황재기’ 와 『자치통감』에서 서기 336년 창려 극성의 모용황이 요동 평곽의 모용인을 치러가는 기록에 의하면, 요동 평곽은 창려 극성의 동쪽에 있으며 평곽과 극성 사이에 300여리의 바다가 있었다. 당시의 해수면을 참고하여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현 하북성 당산시 부근을 평곽으로 볼 경우 사서의 기록과 부합된다.

⑥『구당서』장검열전’과 『자치통감』에서 A‧D 645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의 기록에 의하면, 하북성 정주시와 요동 평곽(건안성)까지는 13일 이내의 진군거리 였다. 현 하북성 당산시를 평곽으로 볼 경우 합리적인 역사 해석이 가능해진다.

 

2) 요동군 양평의 위치

요동군 양평현의 위치는 오늘날의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부근이다. 양평은 요동성이 위치한 곳이다. A‧D 645년 고‧당 전쟁시 당태종의 진군로를 보면 요하를 건너서 제일 먼저 요동성을 만나고,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안시성을 만난다. 안시성을 치기 전 당태종과 이세적의 대화를 통하여 안시성의 남쪽에 건안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세적이) 대답하였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는데 지금 안시성을 지나쳐 건안성을 쳤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군량 길을 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여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을 치며 나아가 건안성을 빼앗는 것이 낫겠습니다(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將若之何 不如先攻安市 安市下 則鼓行而取建安耳)”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건안성이 평곽에 위치하였고, 평곽은 오늘날의 하북성 당산시 부근임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요동성은 대략 하북성 당산시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또 『기주협우갈석도』를 통하여 요수가 오늘날의 조백신하임도 앞에서 살펴보았다. 조백신하를 건너서 하북성 당산시의 서북쪽으로 요동군의 치소가 될 만한 요충지는 오늘날의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뿐이다. 또 『한서지리지』등에 따르면 요동군 양평현에는 양수梁水라는 서남류 하는 강물이 있었는데, 천진시 계현薊縣 방면으로 려하黎河, 사하沙河 등 서남류 하는 강들이 있다.

3) 창려군 용성극성의 위치

창려군 용성은 하북성 북경北京 북쪽이며, 극성은 북경 동남쪽의 랑방시廊坊市 부근이다. 앞에서 『진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을 통하여 창려 극성의 동쪽에 요동 평곽이 있으며, 그 사이에 300여리의 바다가 놓여 있음을 보았다. 요동 평곽이 현 하북성 당산시 부근이므로 창려 극성은 그 서쪽으로 300여리 떨어진 현 하북성 랑방시廊坊市 부근이다.

또 두우의 『통전』에 의하면 창려 극성의 서북쪽 170여리에 유성이 있었으므로 유성은 현 하북성 북경 부근이다. 유성은 진秦나라와 전‧후한 및 진晉나라 때 요서군에 속하였다. 『기주협우갈석도』를 보면 요서군이 북경부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성의 북쪽이자 용산의 남쪽에 용성이 있었다. 고지도인『당토명승도회』를 보면 북경 북쪽의 군도산이 용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창려군 용성은 오늘날의 북경 북쪽지역에 해당하며, 후위와 수나라 및 당나라의 영주營州이다.

“영주는 지금 유성현을 다스린다. 은나라 고죽국 땅이다. 한나라의 청산 도하현은 군성의 동쪽 190리에 있다. 극성은 ‘전욱의 터’로 군성의 동남 170리에 있다. 춘추시대 산융에 속했고, 전국시대 연나라에 속했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아우르자 요서군에 속했다. 전‧후한과 진晉나라도 그러했다.

모용황은 유성의 북쪽, 용산의 남쪽이 복과 덕이 있는 땅이라 하여 궁묘를 짓고 유성을 용성으로 고쳤다. 마침내 용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새로운 궁을 화룡궁으로 불렀다. 황은 이때 흑룡과 백룡 각 1마리가 용산에서 싸우므로, 신하들을 거느리고 구경하며 태뢰太牢를 지냈다. 두 마리 용이 서로 머리를 꼬며 희롱하다가 뿔을 풀고 가버렸다. 황이 크게 기뻐하며 화룡궁이라 불렀다. 후연의 모용보와 북연의 풍발이 서로 이어서 수도로 삼았다. 모용운이 풍발에 멸하고, 풍홍에 이르러 후위에 멸망했다.

후위가 영주를 설치했다. 후주의 무제가 북제를 평정하자, 그 땅은 고보령이 차지했다. 수나라 문제가 고보령을 평정하고, 다시 그 땅을 영주로 삼았다. 수나라 양제 초에 주를 폐하고 요서군을 두었다. 대당나라가 다시 영주로 삼았다. 혹은 유성군이라 했다. 1개현을 다스린다(營州今理柳城縣. 殷時爲孤竹國地. 漢徒河縣之靑山, 在郡城東百九十里. 棘城卽顓頊之墟, 在郡城東南一百七十里. 春秋時, 地屬山戎. 戰國時屬燕. 秦幷天下, 屬遼西郡. 二漢及晉皆因之. 慕容皝以柳城之北, 龍山之南, 所謂福德之地也, 乃營制宮廟, 改柳城爲龍城, 遂遷都龍城, 號新宮曰和龍宮. 皝時有黑龍白龍各一, 鬥於龍山, 皝率屬僚觀之, 祭以太牢, 二龍交首嬉戱, 解角而去. 皝大悅, 號曰和龍宮. 後燕慕容寶 北燕馮跋, 相繼都之. 至慕容雲, 爲馮跋所滅;至馮弘, 爲後魏所滅也. 後魏置營卅. 後周武帝平齊, 其地猶爲高寶寧所據. 隋文帝時討平寶寧, 復以其地爲營州;煬帝初州廢, 置遼西郡. 大唐復爲營州, 或爲柳城郡. 領縣一)” 『통전』‘주군전’

4) 현토군 고구려현의 위치

현토군 고구려현의 위치는 현 하북성 승덕시承德市 부근이다. 현토군은 요동군의 북쪽지역에 해당한다. 통설에서는 현토군 고구려현의 위치를 요령성 심양부근으로 보고 있다. 심양은 옛 이름이 승덕承德이다. 『대청광여도』에 심양이 승덕으로 표기되어 있다. 하북성 지역에도 마찬가지로 승덕承德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은 공손씨 요동의 북쪽지역으로 요충지에 해당하므로 현토군의 중심으로 본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에 따르면 현토의 북쪽 천여 리에 부여성이 있다고 하였다. 『거란지리지도』를 보면 요나라의 상경 오른쪽에 황룡부가 있는데, 『요사지리지』를 참조하면 이곳이 발해의 부여부로 부여성이 있던 곳이다. 요나라 상경은 요령성 파림좌기巴林左旗 부근이며, 부여성은 파림좌기 동쪽의 천산天山 부근이다. 이곳은 현토의 중심지로 비정되는 하북성 승덕시에서 북쪽으로 천여 리에 해당한다.

 

3. 위나라 사마중달의 공손연 정벌

하북성 요동 땅을 점거한 공손연은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동맹관계를 번복하고 있었다. 위나라는 적국인 오나라에 명마를 공급하고 있는 공손연이 눈엣가시였으나, 촉한의 중원진출을 막느라 공손연을 도모할 여력이 없었다. 227년부터 시작된 촉한의 4회에 걸친 중원진출 시도는 234년 제갈공명이 전쟁중에 병사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제갈공명 사후 촉한의 세력이 약화되자, 위나라는 236년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공손연을 토벌하기로 했다. 경초 원년(237년) 유주자사 관구검을 파견하였으나, 관구검 등이 싸움에 불리하여 돌아왔다. 『삼국지』에 의하면 경초 연간에 위나라는 먼저 공손연 세력의 허리를 자르기 위해서 수군을 동원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을 기습하여 평정하였다.

“경초 연간(A.D 237~239년)에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낙랑·대방의)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의 벼슬을 주었다.

(한족의) 풍속은 의책衣幘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戶들도 (낙랑이나 대방) 군에 가서 조알할 적에는 모두 의책를 빌려 입으며, (대방군에서 준) 자신의 인수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된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신지臣智와 한인韓人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때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하였으나 2군은 마침내 한韓을 멸하였다” 『삼국지』‘위지동이전 한韓’

낙랑군과 대방군을 먼저 평정한 후, 위나라 명제는 요동의 공손연을 본격 토벌하기 위해 장안에 있던 사마의를 낙양으로 소환했다. 사마의는 제갈공명과의 싸움으로 유명한 사마중달 그 사람이다. 『진서晉書』‘선제기’와 『삼국지』‘공손도전’을 통하여 사마선왕(사마중달)이 공손연을 토벌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이때 고구려도 주부 대가가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왔다.

경초 2년(238) 선제(사마중달)는 우금, 호준 등과 보기 4만을 이끌고 낙양을 출발했다. 진군하면서 황하를 건너 고향인 온현에서 여러 날 동안 잔치를 열었다. 그리고는 진군하여 고죽을 지나고 갈석을 넘어 요수에 이르렀다(遂進師, 經孤竹, 越碣石, 次于遼水.).

공손연은 보기 수만 명을 보내 요수遼隧에 방어막을 치고 수비하며 남북으로 6~70리에 걸쳐 선제(사마중달)와 맞섰다. 선제가 많은 기치를 펼치며 대군을 가장하여 그들의 남쪽으로 출군하자, 적의 정예병이 다하여 나아왔다. 이에 배를 띄워 몰래 강을 건너 그들의 북쪽으로 출격했다. 적의 진영과 가까워지자 배를 가라앉히고 다리를 불태운 후 요수遼水가에 길게 포위하고는, 적을 내버려 두고 양평으로 향했다.

모든 군사들이 전진하여 수산首山에 도착하니 공손연이 다시 비연 등을 보내 군사를 맞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게 했다. 다시 이를 공격해 대파하고는 진군하여 양평성 아래에 이르러 성 주위에 참호를 팠다. 때마침 장마비가 30여 일 동안 내려 요수遼水가 크게 불어나 물자를 운반하는 배가 요구遼口에서 곧바로 성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비가 그치자 토산을 쌓고 망루를 세우고 투석기, 연노連弩를 만들어 성 안으로 쏘았다. 공손연은 매우 급박해졌고 양식이 다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장군 양조楊祚 등이 항복했다.

8월 병인일(7일) 밤, 길이 수십 장에 이르는 큰 유성이 수산首山 동북쪽으로부터 양평성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임오일(23일), 공손연의 무리가 무너지니 아들인 공손수와 함께 수백 기를 거느리고 포위를 돌파해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대군으로 급히 들이쳐 양수梁水 가의 유성이 떨어진 곳에서 공손연 부자를 베었다. 성을 함락하여 상국相國 이하 수천 명의 수급을 베었고 공손연의 수급을 낙양으로 보냈다. 요동, 대방, 낙랑, 현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이제 『진서晉書』와 『삼국지』를 통해 살펴본 위나라의 공손연 정벌과정과 『위나라 공손연 정벌 상황도』를 검토해보자.

① 서기 236년 위나라와 고구려 동맹.

② 서기 237년 유주자사 관구검 공손연 정벌 실패.

③ 경초 연간(A.D 237~239년) 위나라 수군으로 낙랑군과 대방군 평정. 이것이 위 지도의 1차 공격이다. 당시 낙랑군 지역은 앞에서 『해수면 +6M 지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다와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낙랑군 지역은 서쪽으로는 험준한 갈석산(백석산)이 가로 막고 있어서 수군이 아니면 공략하기 어려운 천연의 요새였다. 기원전 108년 한무제 수군의 왕검성 공격, 서기 44년 후한 광무제의 바다를 통한 낙랑 점령 등이 모두 저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졌다.

위나라의 수군을 통한 낙랑군과 대방군 평정은 공손씨 세력의 허리를 끊은 것과 같다. 이로 이하여 위나라는 공손연의 세력을 절반으로 줄이는 동시에 낙랑군에 위치한 갈석산(백석산)의 자형관紫荊關을 통하여 대규모의 보병이 진군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할 수 있었다.

④ 서기 238년 사마중달 낙양에서 황하를 건너 고향인 온현을 지나고, 진군하여 고죽을 지나고 갈석을 넘어 요수에 이르렀다(遂進師, 經孤竹, 越碣石, 次于遼水.). 이때 고구려도 주부 대가가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왔다.

사마중달의 위나라 군대가 통과한 고죽국은 곧 낙랑군 지역이다. 갈석산은 낙랑군 지역에 있는 오늘날의 백석산(해발 2,096M)으로 자형관紫荊關이라는 관문을 통해서만 지날 수 있는 험산준령이다. 요수는 오늘날의 조백신하이다.

⑤ 사마중달과 공손연의 군대가 요수현遼隧縣에서 대치함. 사마중달의 위나라 군은 남쪽으로 요수를 건널 것처럼 적을 속이고, 몰래 북쪽으로 진군하여 배를 띄워 요수를 건너 양평성을 포위하였다. 포위 기간이 길어지자 양평성 안에서는 양식이 다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죽은 자가 매우 많을 정도로 혼란하게 되었다.

⑥ 238년 8월 23일, 공손연이 수백기를 거느리고 포위를 돌파해 동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양수梁水 가에서 참수되었다. 이로서 요동, 대방, 낙랑, 현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손씨의 낙랑군, 대방군, 요동군, 현토군 등을 필자가 비정한 하북성 지역으로 볼 경우, 위나라의 공손연 정벌과정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반면 통설의 낙랑군, 대방군, 요동군, 현토군 등을 놓고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① 공손씨 요동의 동쪽에 동서 2천여 리의 고구려 강역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삼국지』를 비롯한 수많은 중국의 정사 기록과 위배되는 것으로 통설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②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가 『산해경』『사기색은』『무경총요』등 수많은 사서의 기록과 맞지 않다.

③ 요동군 평곽의 위치가 『진서』『자치통감』『구당서』등의 기록과 맞지 않다.

④ 발해만은 가운데로 북상하는 강력한 해류가 존재한다. 이 해류로 인하여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건너가는 뱃길은 대단히 위험하다. 당시의 선박기술로 대규모 수군을 산동반도에서 한반도 평양으로 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통설에 의하면 요동군 서안평현이 오늘날의 요령시 단동 일대인데, 공손연 집권시 서안평현은 고구려 강역이었다. 즉 고구려에 의하여 공손씨 세력은 이미 두 토막으로 나있는 상태였으므로, 위나라가 큰 위험을 무릅쓰고 발해만을 건너 낙랑‧대방을 평정할 필요가 없었다.

⑤ 또 사마중달의 위나라 진군로를 보면 고죽국을 지나고 갈석산을 넘어 요수에 이르렀다. 통설대로 한반도 평양이 낙랑군이라면 평양에 갈석산이 있어야 한다. 위나라 보병이 한반도 평양으로 날아갈 갈 수도 없거니와 평양에서 진군하면 요수보다 양평성이 먼저 나온다. 『진서晉書』와 『삼국지』에 나오는 위나라의 공손연 정벌과정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4. 결론

공손씨 요동은 하북성 지역이다. 그리고 그 동쪽으로는 동서 2천리 강역의 고구려가 존재하였다. 이것은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의 수많은 정사들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오늘날의 요령성 요동은 요나라 이후 하북성 요동이 지명이동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 시대의 요동을 요령성 요동에서 찾는 것은, 등이 가려운데 허벅지를 긁는 것과 같다. 긁어도 긁어도 시원치 않다. 한민족의 상고사가 미로에 빠진 이유이다. 하북성 요동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짙은 안개가 사라지고, 찬란했던 한민족의 상고사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제 태행산맥에 위치한 갈석산(백석산)을 되찾아야 할 때이다. 아사달의 중심에 위치했던 갈석산(백석산)은 우리들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북성 요동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였던가? 그들의 꿈과 이상은 무엇이었던가? 공손씨 정권의 몰락을 뒤로하고 거친 파도가 몰아쳤던 5호16국시대로 뱃머리를 돌린다. 사랑과 욕망이 수놓는 거대한 역사의 숨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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