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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한국의역사

백제시조는 부여왕 구태/해상강국의 기반은 서남해 해상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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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백제전]"백제의 영토는 서로는 바다(서해)를 건너 월주(양자강 지역)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발해만)를 건너 고구려와 접하고 남으로는 바다(남해)를 건너 왜(일본열도)에 이른다"

아시아 해상국가 백제의 기반세력은 고대부터 해상루트를 개척하여 고인돌.옹관문화를 유럽.중동까지 전파한 서남해 마한(일본의 뿌리모국)의 해상세력이다.

 

 


 

해상강국 백제 시조는 동명성왕(고두막)의 후손인 부여왕이며 요동태수 공손탁의 사위 구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을 인용하여, "부여왕 동명(고두막)의 후손 구태(仇台)란 자가 있어 매우 어질고 신실했는데, 대방(帶方)의 옛 땅(한반도=마한)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이 자기 딸을 구태에게 시집 보냈으며 마침내 동이(東夷) 가운데서 강국이 되었다. 처음에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한나라 말에 공손탁(公孫度)이 해동에서 패권을 장악하여 주변의 이민족을 위력으로 복종시키자 부여의 왕 위구태는 다시 요동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하매, 공손탁으로서는 부여가 이들 두 나라 중간에 끼어 있다고 생각하여 종실의 딸을 위구태에게 시집을 보냈다."라고 되어 있다.《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부여의 왕 위구태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왕위에 올랐다. 적자는 없고 서자 마여(麻余)만 있었다. 마여가 죽으니 여섯 살 난 그의 아들 의려(依慮)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통고(通考)》에 따르면 구태(仇台)는 후한 후기의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 따르면 구태(仇台)의 성(姓)은 위(尉)이다. 《삼국지(三國志)》, 《북사(北史)》, 《수서(隋書)》에 따르면 백제(百濟)는 후한 후기에 부여 태자 구태(仇台)가 세웠다고 한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후주서(後周書)》를 인용하여, "백제는 마한에 속했던 나라요,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仇台)라는 자가 대방(帶方)에 나라를 처음으로 세우니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와 닿아 있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접해 있으며, 서쪽 남쪽으로는 모두 대해를 한계로 하였다. 왕의 성은 부여씨(夫餘氏)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부여는 금와왕, 대소왕 이후에, 22년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망했고, 대소왕의 동생이 갈사부여를 세웠다. 121년 고구려가 후한과 전쟁할 때 부여 태자 위구태(尉仇台)가 후한이 지배하던 현도성을 침공한 고구려의 군사를 공격하여 후한을 구원하였다. 《후한서》에 따르면, 영년 원년(서기 120년)에 부여의 왕이 사자 위구태를 보내어 대궐로 가서 후한 황제를 찾아뵙게 하였다고 한다.

잊혀진 땅 - 백제 22담로의 비밀

 

중국 제나라의 역사서 '남제서' 백제전에는 이상한 전쟁의 기록이 남아 있다.

 

'위나라는 기병 수십만을 동원해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국경안으로 쳐들어갔다. 동성왕은 사법령, 찬수류, 해려곤, 목간나 등을 보내 위나라 군을 습격하여 대파했다.'


백제의 영토가 한반도 남서부로 국한했을 경우, 위나라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선 바다와 고구려의 영토를 지나서 백제를 공격하는 것인데 이는 둘다 성립하기 어렵다.

첫째, 위나라 군사는 수군이 아닌 기병이었고, 둘째, 강성했던 고구려가 위나라 군사에게 길을

 

내줄리 만무했으며 그런 기록도 없다.

따라서 이 전쟁이 가능하려면 백제와 위나라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중국 대륙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얘기다.

 

중국 북경 도서관.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중국 대륙 진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중극 측의 백제 관련 기록은 송서, 남제서, 양서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들 사서의 기록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고, 백제 역시 진평, 요서 2개의 땅을 빼앗아 다스리면서 그곳에 백제군을 설치했다.'고 전한다.

 

진가위 교수 사서에는 '요서'는 '유성'과 '북평'의 사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유성과 북평은 1천년 전의 지명이다.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지리학자에 의하면 유성은 현재의 요녕성 조양시이다. 북평군은 현재의 하북성 노령시이다.

기록에 의하여 추정한 요서의 위치.

그곳은 현재 요녕성과 하북성 일대 발해만 연안의 광활한 지역이다. 중국 역사서에는 중국 지명을 직명으로 가진 수많은 백제 태수들의 이름이 등장한다.이들은 중국 동부 해안지역의 태수들이다.

 

윤내현 교수 '고대 중국 동부 해안지역에는 동이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조선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동이족은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민족이 이곳에 진출할 수 있었던 기반은 이미 마련돼 있었다. 그런데 백제가 중국에 진출할 시기에는 중국이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여러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는 시기였고, 북방의 민족이 중국에 왕조를 세우고 흥망이 반복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런 혼란기에 백제가 중국 동부 지역에 진출한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중국 중앙민족대학.

황유복 교수 '백제가 진평군을 경략했다는 기록이 제일 처음 나오는 기록이 송서이다. 이때 마침 송나라때 진평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지금의 요서지역이 아니라 지금의 남방에 있는 광서지역이다. 광서 남령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그 지역이 진평군의 소재지였다.'

광서 장족 자치구의 모든 마을 이름이 모두 수록된 행정구역자료열람.

 

그 속에 선명한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백제향이었다. 백제향의 중심지는 백제허. 허는 유적지. 그 말 뜻대로라면 이 지역은 백제의 유적지라는 얘기가 된다. 백제허를 중국어로 읽으면 '다이쯔쉬'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을 이릉을 '대백제' 또는 '대박제'라고 부른다.


남령에서는 백제허를 오가는 정기 시외버스가 있다.

 

남령으로부터 3시간, 백제허가 거기 있었다. 그러나 옛성의 흔적은 없고 중국의 시골풍경만 남아 있다. 이들은 한족도 남방계 민족도 아닌 장족이다.

 

낯익은 나즈막한 부뚜막은 입식 구조의 중국인의 부엌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한 옆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는 멧돌이 있었다. 이것은 흔한 것이 아니며 한반도의 전라도 멧돌과 꼭 닮아있다

 

다른 집에는 외다리 방아가 있다. 우리나라 전역에서는 쌍다리 방아를 썼다. 외다리 방아는 오직 전라도 지방과 일본지역에서만 전승되어온 것이었다. 이들 지역은 바로 백제권이다. 백제허의 사람들은 백제권의 생활문화를 편륜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누구일까?

 

육태정 (81)언제인지는 모르나 아주 오래전에 산동 지방에서 왔다고 한다. 산동 지역에서 왜 왔는가? 옛날에 장사하러 왔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전쟁 때문에 왔다는 전설도 있다.

정월 대보름 불렀다는 노래. 사람들은 그 노래 뜻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는 1000년을 그들 속에 살아있었다. 그 노래의 주인이야말로 산동 지역에서 백제허로 온 주역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제의 담록는 중국의 동부해안을 따라 베트남 접경지대인 진평군까지 남하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가 여기까지 올수 있었다면, 인접한 동남아 지역에서 담록의 지명이 발견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닌 것이다.

 

동남아에도 담로가 있었을까?

그 가능성에 대한 증거가 남경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백제 달솔이었던 흑치상지의 묘지명이이다.

 

 

묘지석엔 이렇게 전하고있다. '흑치상지는 원래 성씨가 왕의 성씨인 부여씨였으나, 선조가 흑치에 봉해짐으로써 그 성씨를 흑치로 삼았다'는 것.

흑치는 어디인가? 흑치는 이빨은 검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이는 '띨랑'이라는 열대 과일을 씹는 습관 때문이다.

 

흑치의 선조가 봉해졌다는 땅은 무더운 남방의 땅이었다.

백제의 활동무대는 그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백제의 국호를 다시 한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수나라 역사서에는 백제를 일컬어 '동이강국'이라고 했으며, 건국초부터 백가재해했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라했다고 한다. 백가제해(白家濟海)는 백가가 바다를 제패했다는 뜻이다. 백제는 결코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백제는 바다를 제패한 대제국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해양제국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망했을까?

 

일본서기 천지전황기

 

서기663년 '백제의 최후 거점인 주휴성마저 함락되자 일본 땅의 조신들이 이렇게 식했다. 주휴성이 함락됐으니 이를 어찌하랴.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서 끊겼으니 선조의 무덤을 어찌 오간단 말인가'라고 했다고 한다.

 

일본 땅에서 백제는 본국이었다.

서기 670년 왜 열도는 '일본'이란 국호로 새롭게 태어난다.

통전에는 이렇게 전한다

 

본국백제가 멸망하자 성과 본국 근처에 있던 나머지 무리들은 차츰 약해져서 돌궐과 말갈로 흩어졌다. 그 군주인 부여순도 고국에 돌아갈 수 없음으로 하여 마침내 부여씨는 소멸됐다.

백제 700년 역사, 그 장엄했던 백제는 그렇게 어둠의 저편으로 저물어 갔다.

 

난고촌과 기조정의 사람들은 해마다 12월 이 신성한 바다에서 맞지리를 시작한다. 기조정 사람들이 아버지 정가왕의 신주를 모시고 난고촌까지 걸어갔다. 두 왕에게 아흐레 밤동안 가장 아름다운 술과 노래를 바쳤다.

 

헤어지는 날 아침이면 으레 두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에 검정칠을 한다. 망국의 왕에게는 얼굴을 숨겨야하는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겁은 사라지고 검정칠은 즐거운 유희가 됐다.

헤어질때 그들의 인사는 '오 사라바'.그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한국어로는 명백한 '살아버'라는 말.

 

본국백제가 멸망하자 성과 본국 근처에 있던 나머지 무리들은 차츰 약해져서 돌궐과 말갈로 흩어졌다. 그 군주인 부여순도 고국에 돌아갈 수 없음으로 하여 마침내 부여씨는 소멸됐다.

백제 700년 역사, 그 장엄했던 백제는 그렇게 어둠의 저편으로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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