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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한국의역사

광개토태왕이 대국을 건설하기 이전 고구려는 국가적 위기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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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이 대국을 건설하기 이전 고구려는 국가적 위기를 겪었다. 하나는 11대 동천왕 때 위나라의 공격으로 고구려 도성인 환도성이 함락되고 동천왕이 남옥저까지 피신한 것이요, 또 하나는 16대 고국원왕 때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의 공격으로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고 태후 주씨와 왕후, 그리고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이 탈취당했을 뿐 아니라, 백제와의 싸움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한 것이다.

 

대개 고국원왕에 대해서 그를 비운의 왕이라 보고 그의 시기를 고구려 총체적 위기의 시대라 평한다. 하지만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를 국가 부도의 위기라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수림왕 3년, 고구려는 율령을 반포하고 체제정비를 통해 대국으로서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런데 갓 즉위한 소수림왕 때 이같은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고국원왕은 재위기간이 41년이나 된다. 어쩌면 소수림왕 시기 내부체제 정비는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의 왕권강화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고국원왕은 전연, 백제의 공격으로 총체적 난국을 겪었지만, 그 난국을 헤쳐나가는데 노력했고, 노력의 결실로 아들 소수림왕은 고구려 내부 체제를 정비하여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 통치체제를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손자 광개토태왕은 그런 내부 정비를 발판으로 대외팽창을 함으로써 대국을 건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난 고국원왕에 대해 평하고자 한다.

 

고국원왕에 대해 일제강점기 때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고국원왕은 그 야심은 미천왕보다 더했으나 재략이 그에 미치지 못했다

 

사극 근초고왕에 등장하는 고구려 태왕 사유는 바로 고국원왕을 뜻한다. 사극 근초고왕에 그려진 고국원왕은 야심이 강한 임금으로 그려진다. 고국원왕은 소금장수에서 태왕이 된 미천왕 을불의 아들로, 서기 331년부터 서기 341년까지 4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고구려의 왕으로 재위하였다.

 

 

 

① 고구려와 전연의 전쟁

고구려는 서방의 강대한 세력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의 위협에 맞서 후조의 석호에 사신을 보냈다. 게다가 336년에는 동진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그가 후조, 동진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전연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그는 전연에서 투항해온 동수, 곽충 등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전연의 죄인을 받아들인다는 건 전연과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그의 의지라 볼 수 있다.

 

모용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모용황은 그의 서형(庶兄) 모용한이나 그의 동생인 모용인, 모용소에 비하면 전공이 없다. 유목세계에선 능력이 뛰어난 자가 왕위나 부족장의 지위를 이어받는다. 모용황은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고구려를 침공하여 자신의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더군다나 모용인, 모용소를 죽인 모용황이었기에 그는 내부의 불만을 고구려 침공으로 덮어두려 했다.

 

우문선비로 도망갔다가 모용황의 용서를 받고 돌아온 모용한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우문씨(宇文氏)들이 강성해진 지 오래 되어서 거듭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중략) 신이 오랫동안 그 나라(우문선비)에 있었던지라 그 나라의 지형을 모두 알아서 멀리 있는 강한 갈족(후조)에 붙어있지만 명성과 형세가 이어지지 않고 잇으니 구원해 주는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중략) 그러나 고구려는 그 나라가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어 항상 훔쳐보려는 뜻을 갖고 있으며, 저들은 우문씨가 망하면 그 화가 장차 자기들에게 미칠 것을 알고서 반드시 텅 빈 틈을 타 깊이 들어와 우리들이 대비하지 않게 덮칠 것입니다. (중략) 이는 마음 속에 있는 걱정거리이니 의당 그것(고구려)을 먼저 없애야 할 것입니다. (중략) 이미 고구려만 빼앗고 나면 우문씨를 빼앗는 것은 마치 손을 뒤집는 것과 같습니다.

『자치통감』 권 제97 「진서」

 

이는 전연이 중원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구려를 꺾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용한이 마음속에 있는 걱정거리라 표현할 정도로 당시 고구려는 전연에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모용한은 적극적으로 고구려 공격을 주장하면서 모용황에게 다음과 같은 고구려 침공전략을 제시하였다.

 

고구려로 가는 것은 두 길이있는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남쪽 길은 험하고 좁으므로 사람들은 북쪽 길로 가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翰(한)이 말하기를, "노(虜:고구려)가 보통 생각하기를 필히 대군(大軍)이 북쪽 길로올 것이라고생각하여 북쪽을 중히 여기고 남쪽을 가볍게 여길 것이니 왕은 (그 때)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진격하여 불의(不意)에습격하면북쪽길은 취할 것도 못 됩니다. 따로군사를보내어 북쪽 길로 나아가면 설령 실수가 있더라도 이미 중심이 무너지게 되므로 사지(四支:부분)는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황이 그 말을 따랐다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년조

 

모용황은 모용한의 계책에 따라 자신은 주력군 4만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남로(南路)로 갔고, 북로((北路)는 장사 왕우를 시켜 만 오천명을 이끌고 가게하였다. 갑작스런 전연의 침공에 고국원왕은 침착히 대응했다. 그는 모용선비가 유목민족임을 감안하여 적의 대군이 북쪽으로 올 것이라 판단하여 아우 무에게 정예병 5만을 이끌고 대응하게 하였다. 혹시 몰라 그는 자신이 직접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를 지켰다. 고국원왕은 정예병을 최대한 북으로 몰아주어 적의 주력군을 강타하고 남쪽의 험한 지형을 이용해 적을 격퇴하는 작전을 전개하려 한 듯 싶다. 하지만 결과는 고구려의 패배였다.

 

남로에 모습을 드러낸건 모용연의 선발대였다. 적은 군사로 고국원왕은 모용연의 선발대를 맞아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좌상시 선우량이 죽음을 무릅쓰고 고구려 진지로 돌진하여 고구려의 진이 흔들렸고, 좌장사 한수가 고구려 장수 아불화도가를 죽임으로써 고구려군은 패배를 하였고, 결국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었다. 고국원왕은 단기로 단웅곡으로 피신했으나 전연 장수 모여니가 태후 주씨와 왕후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상황이 전연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북쪽으로 파견된 왕우의 군사는 고무의 대군을 맞아 전멸하였고, 무가 이끄는 고구려 정예병력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만약 고구려군이 남하해 온다면 모용황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상황이 될 것이 뻔하였다.

 

모용한의 책략은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북쪽에서 실패하더라도 지장은 없을 것이라며 거병만 하면 이긴다고 큰소리를 쳤다. 전연이 고구려군에 큰 타격을 준 것은 사실이나 전연 역시 15,000의 병력손실을 봐야했다. 모용황은 안전히 퇴각하기 위해 한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미천왕의 시신과 태후 주씨, 왕후를 볼모로 잡아가기로 했다.

 

한수(韓壽)가 말하기를, "고구려(高句麗) 땅은 (험하여) 지키기 어렵고, 지금 그 국주(國主)는 도망하고 백성은 흩어져 산곡(山谷)간에 숨어 있는데, (연의) 대군(大軍)이 떠나면 반드시 다시 모여 남은 군중을 수습할 것이므로, 오히려 걱정거리가 될 터이니, 청컨대 그 아비의 시체(屍體)를 파 싣고 그 생모(生母:周氏)를 사로잡아 갔다가 그가 속신자귀(束身自歸)함을 기다려이를 내주고 은혜(恩惠)와 신의(信義)로 무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였다. 황이 그 말에 좇아 미천왕릉(美川王陵)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또 부고(府庫)에 있는 누대(累代)의 보물을 취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그 궁실(宮室)은 불태웠으며환도성(丸都城)을 헐어 버리고 돌아갔다.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년조

 

모용황이 미천왕의 시신을 파내 가져간 행위는 모용황의 아비인 모용외의 못된 수법의 답승이다. 모용외 역시 봉상왕 때 고구려를 공격하여 서천왕의 시신을 파내려고 했다. 모용외의 서천왕 시신 탈취시도와 모용황의 미천왕 시신 탈취는 서천왕과 미천왕의 모용선비의 발흥 차단에 대한 분풀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전연의 기습공격에 패배하였다. 하지만 병력 보존측면에서 보면 피해를 본 건 고구려보다 전연측이었다. 비록 고구려의 수도가 함락되었으나, 미천왕의 시신과 태후, 왕후를 볼모로 삼아 퇴각할만큼 전연의 국력이 고구려를 압도한 것은 아니었다. 전연이 이런식으로 퇴각을 한 걸 보면 고구려와 전연의 국력은 엇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② 불리한 상황 속에서 전연에밀리지 않은 고국원왕

 

전연의 침공이 있은 지다섯 달 후 고국원왕은 전연에 사신을 보낸다. 아버지의 시신과 어머니, 그리고 왕후를 돌려받기 위함이다.

 

2월에 왕이 왕제(王弟)를 보내어 연()에 칭신(稱臣) 입조(入朝)하고 진귀한 물건 1,000종을 바쳤다. 燕王(연왕) 황은 이에 그 아비의 시체를 돌려보냈으나 그 어미는 아직 잡아두어 볼모로 하였다.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3년조


아버지의 시신, 어머니, 부인이 볼모로 잡힌 직후 바로 사신을 보내지 않고 수개월씩 사자 파견을 미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태왕의 꿈 저자인 이성재님은 고국원왕 사유는 밖으로는 황제라 칭하고, 안으로는 태왕으로 불리운 천손으로서 하늘의 자손인 자신이 전연의 수괴에게 스스로를 신하라 낮추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으리라 보고 있다.

 

고국원왕이 스스로 몸을 낮추면서까지 전연에 칭신했으나, 모용황은 미천왕의 시신만 돌려줄 뿐 태후와 왕후는 볼모로 붙잡아두고 있었다. 이는 동쪽의 강대한 세력 고구려를 제어하기 위함이었다. 어머니와 부인이 볼모로 붙잡힌 상황속에서 고국원왕은 전연에 꿀리지 않았다.

 

7월 진(晉:동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3년조

전연의 적국이라 할 수 있는 동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 것은 고구려가 전연이 이끄는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고국원왕의 의지였다. 그리고 고구려가 동진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것은 전연의 고구려에 대한 구속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344년 전연의 모용황은 우문선비를 쳐 멸망시켰다. 우문선비의 수장 우문일두귀는 막북으로 도망쳤다가 고구려로 망명했다. 고구려는 전연의 공격에 일시적으로 굴복한 상태였다. 일두귀가 그런 고구려를 망명지로 택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사건이 전연의 재침공의 빌미가 될 수 있음에도 고국원왕은 일두귀를 받아들였다. 일두귀의 고구려망명에 대해이성재님은 고국원왕이 어려움 속에서도 아직 전연 격파의 의지가 꺾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일두귀의 고구려 망명으로 인해 전연은 고구려를 침공한다.

 

15년 10월에 연왕(燕王) 황()이 모용각(慕容恪)을 시켜 우리의 남소성(南蘇城)을 쳐 빼앗고 주둔병(駐屯兵)을 두고 돌아갔다.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5년조

 

어머니와 부인이 볼모로 잡힌 상황에서 고국원왕은 동진과 수교하고 일두귀를 전연에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모용황은 고구려 남소성을 점령하는 선에서 그치고 더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는다. 모용황이 고구려가 일두귀를 받아들인 보복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면서도 볼모에 위해를 가하지 않은 것은 고구려와 전면전을 치룰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전연이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인다면 전연도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고구려가 전연에 칭신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일 뿐, 고구려는 여전히 전연에게 있어 잠재적인 위협국이었다.

 

모용황이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죽고 아들 모용준이 제위에 오르자, 그 이듬해인 서기 349년 고국원왕은 전연을 배반하고 고구려로 망명한 전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돌려보낸다.

 

19년에 왕이 전()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연()에 돌려보내니, 연왕(燕王) 준()은 그를 사()하여 이름을 고쳐 활()이라 하고 중위(中尉)란 벼슬에 임명하였다.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9년조

 

모용준 시기 전연은 북중국에서 절대강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후조가 내란으로 어지러운 틈을 타 계성을 함락하고 이어 후조를 찬탈한 염민을 죽여 후조를 멸망시켰다. 고국원왕이 송황을 전연으로 돌려보낸 것은 전연의 위상변화를 실감하고, 볼모로 붙잡힌 어머니를 되돌려받기 위한 관계 개선을 위한 특탄의 조치였다. 모용준은 제위에 오르고도 여러해 동안 태후 주씨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는 고구려를 통제할 수 없을 때 고국원왕의 생모를 전략적으로 이용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고국원왕은 355년 12월 생모송환을 위해 전연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12월에 왕이 연()에 사신을 보내어 볼모를 주고 조공(朝貢)을 닦으며 왕모(王母)의 반환(返還)을 청하였다. 연왕 준이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도(조)감(刀(刁)龕)을 시켜왕모 주()씨를 호송하게 하고, 왕에게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의 작호를 주고 예전과 같이 낙랑공(樂浪公)에 봉하였다.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25년조

 

모용준은 고구려로부터 볼모를 받는 대신 태후를 돌려보낸다. 이는 태후가 나이가 많고, 또 전연에서 죽으면 고구려와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막고자 태후를 돌려보낸 듯 싶다. 태후 주씨는 볼모로 붙잡힌 지 13년만에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재밌는건 왕후를 붙잡아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서의 기록 어디에도 왕후를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없다. 왕후를 전연측에서 볼모로 계속 붙잡은 것인지 아니면 왕후를 모용황이나 모용준이 취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여하튼 전연이 고구려로부터 새로운 볼모를 받았다는 것은 모용준이 여전히 고구려를 위협세력이라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③ 전연에게 복수를 한 고국원왕, 고구려의 영토를 북경까지 넓히다?
날로 국운이 상승할 것 같았던 전연도 모용준이 죽고 모용위가 왕위에 오르면서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전연의 상서 좌복사 열관은 전연 전체에 팽배해 있는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상소를 올려 개혁을 꾀하였다. 그의 개혁은 경제문제 해결을 통해 왕공귀족(王公貴族)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황제의 권한을 강화시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왕공귀족세력들의 반발을 사 모용평에 의해 열관은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동진은 대사마 환온을 내세워 전연을 침공하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모용위는 전진에 사신을 보내 낙양 동쪽의 호뢰이서(虎牢以西)를 할양하겠다고 하여 전진의 구원을 받았다. 전진군을 청하여 동진의 침공을 물리친 전연은 내분에 휩싸였다. 이속에서 동진군 격퇴에 큰 공을 세운 모용수가 태부 모용평과 태후 가족혼씨(可足渾氏)의 음모에 휘말려 전진으로 도망쳤다. 게다가 전연은 전진에게 약속한 호뢰이서 할양을 거절함으로써 전진의 침공을 초래하였다. 동진의 침공과 내분으로 쇠약해진 전연은 369년 11월 부견의 침공으로 밀리다가 370년 11월 부견이 전연의 수도 업에 입성하고 도망친 모용위가 전진의 추격군에게 체포됨으로써 전연은 멸망했다.

 

전연의 멸망과 관련하여 자치통감은 재미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연(燕) 산기시랑(散騎侍郞) 여울(餘蔚)이 부여, 고구려 및 상당질자(上黨質子) 오백여인을 거느리고 밤에 업의 북문을 열어 전진군을 불러들이니

『자치통감』권102 진서24 해서공 태화 5년

 

당시 전연은 부여 및 고구려를 침공하여 부여, 고구려로부터 많은 인질들을 받은 듯 싶다. 아마 부여, 고구려의 준동을 막고자 한 일인데 거꾸로 이것이 도리어 전연의 멸망을 가져왔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산기시랑 여울은 그 성으로 보아 아마 부여의 왕자가 아닐까 여겨진다.

 

전연이 멸망하자전연의 정치를 전횡하던 태부 모용평이 고구려로 도망친다. 하지만 고구려는 그를 붙잡아 전진에 보냈다.

 

40년에 진(秦:전진)의 왕맹(王猛)이 연(燕)을 쳐부수니 연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우리 나라로) 달려오므로 왕이 그를 잡아 에 보냈다.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25년조

 

고구려가 모용평을 붙잡아 전진에 보낸 것은 강성한 전진과 척을 두지 않고 외교관계를 맺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고구려는 전연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복수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고국원왕 때 전연의 붕괴조짐이 보이자 전진과 함께 전연을 공략하여 유주를 차지했다고 보고있다. 그들은 그 증거로 평안남도 대안시에 발견된 덕흥리 고분의 묵서를 든다. 덕흥리 고분의 주인공은 성은 알 수 없는 진(鎭)이란 사람으로 그는 광개토태왕 19년인 409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덕흥리 고분의 묵서명에는 진이 역임한 벼슬이 나와 있다.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유주자사라는 직함이다. 유주는 오늘날의 북경 일대지방이다.

 

덕흥리고분이 발견되자 북한에서는 고구려가 유주까지 지배했다며 주장한다. 북한학자 김용남은 진은 고구려에서 출생했으며 4세기 말 고구려가 요하유역에서 산서 북부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설치한 유주의 자사로 임명받은 인물이라 주장하였다. 반면 일본과 중국학계는 진은 망명객으로 유주자사는 그가 고구려에 망명하기 전에 역임한 벼슬이거나, 아니면 고구려에서 준 일종의 허직이라고 한다.

 

북한에서는 명문에 보이는 진의 출신지◇◇군 신도현 도향◇감리의 명문을 보고 고려사 지리지에 가주는 본래 고려의 신도군이라는 기사와 연계시켜 그를 고구려인이라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주인공 진이 중국의 기록에 유주자사를 역임했다는 기록이 없고, 고구려에서 주,군,현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이 고구려인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고구려가 낙랑, 대방 등 중국군현들을 몰아내고 4세기 말경에 주군현제를 실시하였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 고유한 주, 군, 현이 기록되어 있음을 증거로 내세워 고구려가 유주를 차지했다고 보고 있다.

 

여튼 북한에서는 서기 370년 전진의 공격으로 전연의 붕괴조짐이 보이자 당시 전연을 예의주시하던 고구려가 수만의 철기병을 거느리고 전연의 요동군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요서로 진격하여 요서를 석권하고 계속해서 장성이남지역으로 들어가 유주소재지(북경)를 점령했으며 대군, 범양국 지역까지 전과를 확대하였다고 보고 있다. 남진하던 고구려군은 도주하던 모용평을 붙잡았고, 용성에서 전진군과 조우했으나 싸우지 않고 전진에게 모용평을 내주고 전진과 협력하여 전연의 잔여세력을 평정하였다고 한다.

 

이 때 고구려가 유주의 많은 부분을 점령한 기회를 틈타 유주지역에 관리들을 임명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의 유주진출은 당나라 태종이 『진서』를 편찬할 때 그가 고구려를 미워하여 고구려의 유주진출 기사를 당 태종이 의도적으로 삭제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370년에 차지한 유주를 376년까지 고구려가 통치하다가 376년 대릉하 하류 의무려산 줄기계선으로 철수하였다고 한다.

 

북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구려는 모용황에게 당한 수모와 치욕을 철저히 응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국원왕 때 유주까지 진격했다면 그는 나약한 왕이 아니라 고구려의 기상을 북경까지 진동시킨 영웅왕이라 할 수 있다.

 

④ 고국원왕, 황제를 칭했다?, 고국원왕 = 소열제?

고구려가 고국원왕 12년(342)에 겪은 전연의 침공으로 곤경에 처했지만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수림왕 초기에 율령을 반포한 것을 보면 고국원왕이 전연의 침공을 계기로 체제정비에 박차를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복구는 국가체제정비에 명분으로 적당하며, 그러한 명분을 내세워 귀족세력을 억제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고국원왕은 카리스마가 있는 군주인 듯 싶다.

 

전쟁에서 패전함으로써 귀족들로부터 그 책임을 문책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는 왕권을 강화시킨다. 일례로 신라와의 전쟁을 적극 주장한 태자 여창은 아버지 성왕이 신라에 의해 전사당하고 혼란의 와중에 왕위에 올랐을 때, 귀족들에 의해 왕권이 제약되어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위덕왕의 사례에 비교해볼 때 고국원왕의 국정장악능력이 대단했음을 엿볼 수 있다.

 

어쩌면 고국원왕은 왕이 직접 적을 맞아 싸우러 나간 상황에서 도성을 지키지 못하고 적들에게 내어주었다는 구실로 귀족들의 권력을 제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극 근초고왕을 보면 고국원왕의 호통에 신하들이 쩔쩔 매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 고국원왕은 사극 근초고왕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국정을 장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소수림왕 3년의 율령반포는 그 이전 왕권을 강화하고 고구려 내부 체제정비의 완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미천왕시기 대외팽창에 따른 지배영역의 확대와 전연과의 계속된 군사적 대립관계는 보다 공고한 국가기반의 확립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러한 면을 구체화하는 것은 고국원왕대 이루어졌고, 그것이 소수림왕에 이르러 율령반포로 일단락지어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고국원왕은토착적인 귀족세력의 독자성을 약화시켜 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내로 편제시켜 통치체제정비를 마무리 지었을 것이다.

 

고국원왕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정비함으로써 내부적으로 칭제(稱帝)했을 가능성이 높다.

 

위궁 현손은 소열제(昭列帝)라 하는데 (이때) 전연이 침입하여 환도성에 쳐들어와 궁실을 불태우고 크게 약탈한 후 돌아갔다. 열제(列帝)가 백제와 싸우다가 죽었다

『수서』권81 「열전」46 동이 고려조

 

위궁이 또한 용기와 힘이 있어 힘을 믿고 서안평을 침략하니 유주자사 관구검이 그것을 격파하였다. 그 현손이 을불리이며, 을불리의 아들 (釗)열제(烈帝)때에 전연과 서로 싸움하였다. 건국 4년 모용원진(모용황)이 무리를 거느리고 남쪽의 좁은길로 들어와서 목저성에서 싸워 쇠(釗)의 군대를 대파하고 승승장구하여 드디어 환도성에 들어가게 되었다.

『위서』권100 「열전」88 고구려조

 

위 기록에 보이는 소열제(昭列帝) 혹은 쇠열제(釗烈帝)는 고구려 고국원왕을 가리키는 것 같다. 위 기사의 위궁은 동천왕, 현손은 을불(미천왕)이다. 수서는 위궁의 현손을 소열제라 했는데 이는 아마 위서를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수서 편찬자의 착오일 듯 싶다.

 

『위서』의 '利子釗烈帝時'에서 '烈帝'를 보통 북위의 태조 도무제 탁발규의 선조인 열제로 보고 있다. 『위서』가 북위에 대한 기록이며, 북위 烈帝(탁발예괴)의 활동시기가 고국원왕과 겹치기 때문에 도무제의 선조인 '烈帝時'라 지칭했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문장상 주어는 고구려지 북위가 아니다. 그렇기에 문맥상 북위 열제로 보면 문장의 흐름이 어색하다. 列과 烈이 통한다고 볼 수 있다면 烈帝는 昭列帝 즉 고국원왕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우리측이 아닌 중국사서인 『수서』와 『위서』에 고구려의 칭제사실이 언급되어 있으며, 중국측에서 帝의 칭호를 써서 위작하였을 가능성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고자묘지명을 보면 모용부의 대규모침입시 공을 세운 고밀을 왕으로 봉하려 한 점으로 보아 고국원왕의 칭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고국원왕은 부왕인 미천왕대의 업적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정비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통해 확립된 전제화된 왕권의 존재를 내외에 알리고자, 그리고 전연의 공격으로 위축된 국정을 쇄신하고자 칭제한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⑤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함으로써 생을 마감하다

 

고구려와 백제는 고구려 서천왕 때 대방을 공격할 때 대방을 구원하러 온 백제와 접전을 벌인 바 있다. 그 후 고국원왕 때 고구려는 다시 백제와 맞부딪힌다.

 

39년 9월에 왕이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남으로 백제(百濟)를 정벌(征伐)하여 치양(雉壤)에서 싸우다가 패하였다.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9년조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전연에게 굴복한 고구려가 서진정책이 좌절되자 남진정책으로 정책을 전환했다고 보고, 백제를 친 것은 그 일환이라 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고구려는 동진과 수교하고 우문일두귀의 망명을 받아주는 등 전연을 지속적으로 견제한다. 아마 고구려의 치양성 침공은 끊임없이 대방지역으로 북진하려는 백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공격이었을 것으로 본다.

 

고국원왕은 세 차례에 걸쳐 백제와 전투를 벌이지만 패배하고 만다. 이는 고구려의 군사가 백제보다 약해서가 아니라 전연의 위협으로 대백제전에 고구려 정예군을 투입하기 어려웠기

 

실제로 고구려의 군사 대부분은 잘 훈련된 정예병이 아니었고 오직 붉은 기를 든 소수의 군사만이 정예병이었다. 이는 백제인으로 고구려에 투항했던 사기란 사람에 의해 백제 측에 알려짐으로써 고구려는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제는 크게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고구려군을 끝까지 추격할 수는 없었다. 이는 당시 백제군의 역량이 고구려군을 압도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高句麗)의 국강왕(國岡王:고국원왕) 사유(斯由)가 친히 내침(來侵)하므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태자(太子)를 보내어 이를 막게 하였는데, 반걸양(半乞壤)에 이르러 장차 싸우려 하였다. 고구려 사람 사기(斯紀)는 본시 백제인(百濟人)으로서 잘못하여 국마(마)의 발굽을 상하게 하자죄를 받을까두려워 고구려로 도망하였는데, 이 때 다시 돌아와 태자에게 이르기를, "고구려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나 모두 수()만을 채운 허위병일 뿐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직 적기(赤旗)뿐이니, 만일 먼저 이를 깨뜨리면 나머지는 치지 않더라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이에 좇아 진격하여 크게 적()을 깨뜨리고, 도망치는 것을 뒤따라 으로 쫓아 수곡성(水谷城) 서북에까지 이르렀다. 장군(將軍) 막고해(莫古解)가 간()하기를,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을 들으니 '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가 많으니 어찌 구할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하였다. 태자가 이 말을 선(선)히 여겨 (추격하기를) 그만두고 돌을 쌓아 표식(表識)를 삼았다. (태자가)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다보며, "금후(今後)에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 하였다. 그 곳에는 마치 말 발굽같이 틈이 생긴 암석(岩石)이 있는데, 사람들이 지금도 태자(太子)의 말자취 라고 부르고 있다.


『삼국사기』24 「백제본기」 근구수왕


치양성 패배 후 2년 후인 371년 고국원왕은 다시 백제를 공격한다. 370년에 전연이 멸망하여 서부변경의 위협이 사라진 고국원왕은 고구려의 대방땅을 노리는 백제를 견제하고자 재공격에 나선다. 하지만 고구려는 패하에서 백제의 매복 기습 공격에 걸려 패배하고 만다.

 

26년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오므로, 왕이 듣고 패하(浿河:예성강) 강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그 옴을 기다려 공격하니 고구려병(高句麗兵)이 패배(敗北)하였다.

『삼국사기』24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

 

고구려의 패배에 대해 이성재님은 비록 전연이 멸망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당시 중국의 정세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던 상황이라 고구려가 대백제전에 온전히 군사력을 집중시키기 곤란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고구려가 약해서 진게 아니라 급변하는 대륙정세로 인해 군사력이 양분되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고구려가 백제를 친 보복으로 백제 근초고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한다. 그리고 고국원왕은 이 때 평양성에서 백제군을 막다가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41년 10월에 백제왕(百濟王)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平壤城)을 치니, 왕이 군사를 내어 막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이 달 23일에 돌아갔다. 고국원(故國原)에 장사하였다[백제(百濟) 개로왕(蓋鹵王)이 위주(魏主:위나라 황제)에 보낸 표문(表文)에 '釗(쇠:고국원왕)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 것은 너무 지나친 말이다].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9년조


( 26년)겨울에 왕이 태자(太子)와 함께 정병(精兵) 3 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侵入)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斯由)가 역전하여 막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죽으니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왔다.

『삼국사기』24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

 


비록 고구려는 태왕이 전사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평양성을 지켜낸 것 같다. 이는 고국원왕이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최전선에서 군사들을 독려하며 싸운 결과였다. 임용한 교수님은 평양성 전투는 백제의 패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제기한다. 사료 어디에도 백제가 평양성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없는 걸로 보아 백제는 성과가 없어 퇴각했던가 아니면 고구려에 패배했을 가능성이 높다. 옛날 고구려 대무신왕이 부여를 칠 때 부여의 대소왕을 죽였으나, 오히려 부여군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전멸할 뻔한 기록을 보면 말이다. 어쩌면 고국원왕은 죽음으로써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결과적으로 백제군을 패배시키지는 않았나 생각이 든다.

 

전략적 착오로 전연에게 패배하여 부왕의 시신과 모후, 왕후를 볼모로 빼앗기고, 백제군을 막다가 전사한 고국원왕....

그의 일생을 보면 비운의 임금이다. 하지만 그는 나약한 왕이 아니었다. 전연에 패배했지만 안으로는 힘을 기르고 태왕권을 확립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했기에 소수림왕의 율령반포를 낳았고, 훗날 광개토태왕이 대국을 건설한 밑거름을 마련했다.

 

그는 비운의 왕일지는 몰라도 나약한 왕은 아니었다. 그의 희생으로 고구려는 한층 도약하여 대국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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